신라 금관총에서 발견된 이사지왕의 수수께끼
신라 금관총에서 발견된 이사지왕의 수수께끼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3.07.2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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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총에 부장된 환두대도의 소유자 이름이 최근 밝혀져 국사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사지왕’

1600년 만에 푸른 녹을 걷어낸 신라 금관총의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학계는 흥분과 당황의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모든 정황들이 맞지 않았다.

신라 금관총의 주인공은 허리에 칼을 차지 않은 상태여서 부장자는 여성이라는 의견이 유력했다. 그런데 금동으로 된 손잡이의 환두대도가 함께 발견됐고 이 칼의 주인공의 이름이 밝혀진다면 신라사의 많은 연대가 정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이사지왕’이라는 신비의 주인공으로 인해 더 혼란스럽게 된 것이다.

금관총 환두대도의 ‘이사지왕’

고고학계는 일단 이 칼의 주인공이 대단히 신분이 높은 왕족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아울러 금관총의 축조 연대로 보아 4~6세기경의 인물일 것이라는 점에도 의견은 일치한다. 문제는 여전히 그가 누구이며 왜 왕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느냐다.

사실 이 칼에 새겨진 명문을 자세히 보면 이 글자가 장인(匠人)의 것이 아님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만일 당시 장인이 왕의 칼을 만들었고 그 소유자의 이름을 기념해 조각했다면 당시 서체를 따랐을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조악하게 새겨 넣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으로부터 우리는 몇 가지 추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이 칼의 주인공은 실제 공식적인 왕이 아니었을 가능성이다. 왕의 칼에 아무렇게나 흠집내듯 이름을 새겨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칼 손잡이에 소유자의 이름을 적은 자는 칼의 수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검체를 바꿀 때 착탈식의 금동 손잡이에 이름을 적어 놓아서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대에 칼은 권력의 상징이었다는 점이다. 칼의 주인공은 그 수선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고 자신에게 충성심이 강한 믿을 만 한 자에게 맡겨왔을 것이고 그 수선자는 칼의 소유자가 이끄는 그룹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서 칼의 주인공을 부르는 칭호가 바로 ‘이사지’였을 것이고 여기에 ‘王’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정도라면 칼의 소유자는 대단한 권력과 추앙을 받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둘째, 이 칼의 수선자가 손잡이에 소유자의 이름을 적은 이유가 소유자를 기념해서가 아니라면 칼의 수선자는 여러 사람의 칼을 수선하는 자였고 칼의 주인공은 신분 높은 장군들을 거느리는 우두머리였을 거라는 점이다.

그러면 칼의 주인공은 시기적으로 매우 압축될 수 있다. 바로 금관총이 축조될 무렵을 전후해 신라에서 가장 뛰어났던 장군이자 오늘날 국방장관의 자리에 올랐던 신라 내물 마립간의 4대손 이사부(異斯夫)가 그 주인공이다.

이사부와 이사지는 그 이름에서 매우 유사하다. 더구나 이사부(異斯夫)의 夫자는 大人의 의미여서 당시 신라에서 극존칭으로 사용했던 이사지(斯智)의 智와 뜻이 통한다.

이사지왕은 이사부였을까

신라 개국 박혁거세의 별칭은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었다. 경주 김씨의 조상은 김알지(金閼智)였고, 대가야의 시조는 內珍朱智(내진주지)였다. 이처럼 智는 신라에서 성군에 붙이는 존칭이었던 것. 따라서 이사지(斯智)는 이사부(異斯夫)의 이형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사부는 지증왕과 법흥왕 사이에 활동한 장군이다. 국사학자들은 이사부가 신라를 번영의 반석에 올렸고 김유신이 이를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했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사부는 505년(지증왕 6년) 지금의 강릉에 해당하는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로 임명됐다. 512년에는 우산국(于山國 : 지금의 울릉도)을 점령했다.

541년(진흥왕 2) 이사부는 병부령(兵部令)이 됐다. 병부령은 단순한 병부의 책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등·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 요직이었다. 그 뒤 562년(진흥왕 23)까지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545년 왕에게 국사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왕은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해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했다.

무엇보다 이사부의 공은 백제를 공격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격파함으로써 신라의 무력을 확실하게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사부는 550년경 고구려와 백제간의 충돌을 이용해 백제의 성들을 빼앗았다.

그 과정에서 금현성에 침입한 고구려 군사를 크게 격파했던 것은 신라로서는 국운 상승의 결정적 계기였다. 근래에 발견된 단양신라적성비에 의하면 549년(진흥왕 10) 전후에 이사부는 파진찬두미(豆彌)와 아찬비차부(比次夫)·무력(武力 : 김유신의 할아버지) 등을 이끌고 한강 상류지방을 경략해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

이사부는 또 562년에 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 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이들과 연결된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이후 이사부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점은 신라사에 큰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신라의 부흥을 이끈 이사부에 대해 화랑세기는 거의 神에 버금가는 찬사를 보여준다.

신라 귀족들과 왕족들이 이사부에 보인 로열티는 대단했다. 문제는 그런 이사부의 행적이 갑자기 묘연해진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 대한 미스테리는 어쩌면 금관총의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斯智)왕이라는 이름으로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이사부는 지증왕을 낳은 어머니 지소태후의 지아비였다. 둘 사이에서 공주 숙명이 태어났고, 숙명은 이부(異父) 남매 지증왕과 정을 통해 태자를 낳았다. 이사부는 지증왕의 계부인 동시에 비공식 장인이 되는 셈이다.

만일 학계의 주장대로 이사지왕의 명문이 나온 환두대두의 금관총이 여성 부장자의 묘라면 그것은 시기적으로 지증왕의 어머니이자 이사부의 아내였던 지소태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이사부의 환두대도가 함께 부장됐을 수 있다. 그렇다면 異斯夫(이사부)라는 이름도 짐작이 간다.

복잡한 신라 왕족간의 권력다툼 과정에서 제거됐던 이사지(斯智)의 격하된 이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증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의 입장에서 보자면 異斯夫는 ‘다른(異) 남편(夫)’인 것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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