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둔황에 그려진 한국인
中 둔황에 그려진 한국인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3.07.2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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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중앙아시아의 숨은 실력자였다
 

최근 실크로드 둔황의 막고굴에서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려인들의 모습이 담긴 벽화가 무더기로 발견됐다는 연구보고가 나왔다. 보고자는 중국 둔황연구원. 지난 6일 경북 경주에서 열린 ‘경주 실크로드 국제학술회의’에서였다.

당시 이 내용을 보고한 둔황연구원 측은 막고굴 벽화에 고대 한국인의 대거 등장에 대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중국으로 이주한 백제와 고구려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통일신라와 당(唐)과의 경계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에 이른 점을 염두에 두고 그 이북의 지역, 발해를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흡수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대 한국인들은 서역과 교류가 이전에는 없었던 걸까.

서기 607년 수나라 양제는 변경을 순시하던 중에 오르도스 지역 서쪽의 동돌궐, 즉 지금의 동투르기스탄 시조인 계민카간의 막사에 예고 없이 다다랐다. 계민카간은 이미 수 양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복속키로 한 상태였다.

그때 계민카간은 막사에서 외국 사신들과 모종의 면담을 하고 있었다. 수 양제는 이들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이들은 다름 아닌 고구려 영양왕이 보낸 사신들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지금의 위구르, 즉 동투르기스탄의 투르크에 해당하는 돌궐과 손잡고 수나라를 칠 계략을 세웠다. 수 양제는 그의 선대(先代), 문제가 100만을 선발해 고구려 원정에 나섰지만 별 소득 없이 끝났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 옆에 있던 신하 배구는 양제에게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반드시 돌궐과 연합해 수를 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수 양제는 동아시아 질서를 뒤흔드는 2차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역시 실패하고 수나라는 그 영향으로 멸망하게 된다.

역사가들은 의문을 가졌다. 왜 그렇게 수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집착했던 것일까. 그리고 고구려는 어떻게 저 멀리 유라시아의 투르크족들과 연대를 도모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문제의 해답은 4세기 5호16국과 고구려간의 관계에 있다.

고구려가 중앙아시아에 미친 영향

6세기경 돌궐의 기마궁사.
고구려와 거의 구별이 어렵다.

고고학자 강인욱 서울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는 일찍이 투르크계인 돌궐에 뛰어난 군사무기들을 공급해 왔던 것으로 보고됐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발굴된 돌궐계의 철제 마구들과 도끼, 창과 같은 무기들은 미약했던 돌궐의 문화에서 4세기경부터 갑자기 등장했고 그 유형은 고구려와 정확히 닮아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이 하나의 세력으로 통일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돌궐족을 내세워 중원지역에 힘의 공백을 만들려 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중국의 분열기인 4세기 5호16국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러한 고구려-돌궐(투르크)간의 연대는 문화적 거리가 가깝고 심지어 언어면에서도 친연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이를 언어 종족가설이라고 부른다.

미국 인디아나대 중앙아시아 연구자인 크리스토퍼 백위드(Christopher I. Beckwith)는 몇 년 전 고구려어와 기타 중앙아시아 고대어간의 분석을 통해 고구려어가 투르크계에 근접해 있음을 발표했다. 당시 이 주장은 학계에 큰 충격을 줬지만 민족주의 사관에 매몰돼 있던 국사학계는 제대로 된 평가를 내놓지 못했다.

벡위드의 주장을 하나 살펴보자.

고구려의 초기 중요한 수도는 丸都城(환도성)이었다. 백위드 교수는 이 丸都라는 한자어의 3세기경의 음가가 ‘Ar(丸) Du(都)’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르두’는 고대 투르크어로 군사기지를 의미하는 ‘와르도’, ‘우르도’에 해당할 수 있었다.

백위드 교수는 당시 고구려의 많은 군사어에서 투르크어의 요소들을 발견했다. 그러한 이유는 아마도 고구려가 투르크-몽골계인 선비(鮮卑)를 정복하거나 이들과 교류하면서 종족간에 활발한 교합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선비는 이후에 북위를 세워 동북아에 패자(覇者)로 등장했으며 서쪽으로 그 세력을 넓혀갔다. 이러한 선비족의 문화는 현재 몽골과 카자흐스탄에 큰 유산을 남겼다.

아울러 6세기 초반에 그 세력을 다시 확보한 곡투르크(Gok-truk)는 이후 티무르제국으로 이어져 중앙아시아의 최대 정복자가 됐고 오늘날 투르크연방의 정신적 제국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곡투르크의 발흥에 고구려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강인욱 서울대 교수의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구체적으로 이 곡투르크와 무슨 관계에 있었을까. 우리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다시 수 양제와 고구려 사신들이 조우했던 돌궐의 계민카간의 막사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 사신들을 막사에서 만난 수 양제에게 그의 신하 배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중국의 역사서 <수서>에는 적혀 있다.

“고구려는 원래 고죽국입니다.”(高句麗本孤竹國)

<수서>의 이 구절은 한국 고대사의 미스테리 가운데 하나였다. 고죽국은 殷(은)과 周(주)대에 발해만 지역에 있던 아주 오래된 나라였다. 수양산 고사리만을 먹으며 절개를 지키다가 숨졌다는 백이, 숙제가 바로 이 고죽국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원래 고죽국이라니, 이 말은 사학자들로서는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벽화에 등장한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나 혹은 고구려 씨름도에 등장하는 서역인의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고구려와 곡투르크라는 이름이 가진 모종의 관계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고구려와 투르크는 친족이었을까

배구가 말한 孤竹國의 孤竹(고죽)은 당시 漢語中古音에 따르면 kog(孤)truk(竹)이다.

고대 투르크어로 ‘곡투르크’는 하늘(Gok)의 투르크(turk)라는 뜻이다. 이 곡투르크의 후손들인 투르크 몽골계 Daghur는 큰(Da) 집단(ghur)라는 뜻이고, 위구르(Uyghur)는 날랜(huy) 집단(ghur)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투르크인들로서는 高句麗를 3~4세기 한자음으로 Goh Ghuri로 읽게 되는데 이는 고대 투르크어로 天族을 뜻하는 Gok ghur로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다시 말해 다구르, 위구르, 곡구르는 모두 투르크어로 ‘뛰어난 집단’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수 양제와 동행한 배구는 고구려와 돌궐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돌궐 왕조의 뿌리가 다름 아닌 발해유역의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났다는 연구와도 일치한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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