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지조를 지킨다는 것
정치인이 지조를 지킨다는 것
  • 미래한국
  • 승인 2013.07.3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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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각 교수의 세상보기
 

참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도무지 있을 수도 없고, 발생해서는 아니 될 중요국정관련기록물의 은폐 또는 행방불명사태가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이 미스테리한 사건 보도를 접하는 우리 모든 국민은 황당함의 도를 넘어 울분 폭발 직전까지 와 있다.

2007년 10월 3일 전직 남북 국정책임자 노무현 씨와 김정일 씨 간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관련 평양정상회담 대화기록물이 실종돼 버렸다고 한다. CCTV 카메라와 경비가 삼엄한 국가기록원에서 속된 표현으로 지금 귀신도 곡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인 대화록 실종 사건

정상회담의 역사기록물인 대화록과 그 관련 녹음파일이 당연히 보관돼 있어야 할 국가기록원에서 국회특별조사위원들이 며칠을 뒤져도 찾지 못했다. 자료의 실존은 확실한데 국회조사위원들이 못 찾은 것인지 아니면 당연히 보관되고 있어야 할 문건과 기록물이 어떤 이유로 도둑맞아 사라졌단 말인지 국민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혹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료는 빼돌리고 빈 상자만 봉인해 국가기록원으로 보냈단 말인가? 이런저런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사태이다.

국민세금으로 호의호식하며 고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말하던 이른바 거드럭거리던 자들이 고의로나 무책임으로 이 같은 황당한 상황(자료의 삭제 폐기 또는 분실)을 저질렀다면 이는 심각한 국법위반죄다.

NLL 관련 대화록의 국가기록원 보관 여부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미스테리한 사건을 놓고 국민여론은 떠들썩한데 실제로 이 자료의 진실을 밝혀야 할 책임 있는 국회의원들은 행방불명의 원인 진상 규명에 열을 올리는 척하며 정치적 공방에 시간과 예산을 소진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에게 NLL 포기를 약속했다는 의혹을 밝히는 것이 우선 핵심이라면 여야 국회의원들은 동일한 자료가 보관돼 있는 국정원 보관 자료를 합법적 절차를 통해 열람해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진실을 규명하는 일이 급선무임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일은 뒷전으로 미루어 두고, 서로 입씨름만 하면서 뒷북치기만 하고 있다. 여당이나 야당 양쪽 다 내심, 대화록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의도가 없는 것 같다.

양측이 서로 의혹에 관해 상호비난만 하면서 시간을 끌어 국민과 여론이 피곤감으로 지친 나머지 나자빠지거나 그저 또 망각할 것만을 바라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특히 NLL 문제에 대해 강용석, 하태경, 남경필 등 일부 새누리당 소속 전현직 의원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대화록 공개도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 새누리당의 전반적 입장과 뜻을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이 같은 여당내의 입장차는 그 관련 당사자들의 깊은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당론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들이 개인의 정치적 입지를 우선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자아낸다.

이러한 상황을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 차원에서 볼 때 ‘적전분열’인지 ‘충정’인지 아니면 ‘정치신조와 이념을 달리하는 우(右)와 좌(左)가 일시 세(勢)집결의 필요 때문에 동상이몽하면서 동침하고 있는 형국’인지, 도무지 어떻게 평가하고 해결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국민들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요즘 사회 전반에 걸쳐 사적 이해관계의 변동에 따라 ‘배신과 충정’이 손바닥 뒤집듯 너무 쉽게 빚어지고 있는 부패한 정치권과 사회를 보니 故 조지훈(본명 동탁) 선생님의 ‘지조론-변절자를 위하여’(1960. ‘새벽’ 3월호)란 글이 회상됐다.

정치인은 신념을 위장하지 말아야

4·19 학생운동이 일어났던 나의 고려대 2학년 시절 국어를 가르치셨던 조지훈 선생님은 “지도자와 정치인들은 소인기(少忍飢: 굶주림을 조금만 더 참음)하면서 자기 신념으로 일관하여 변절, 즉 절개를 바꾸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정치인이 지조(志操)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 신념에 일관한다는 뜻이다. 만약 정치이념적으로 공산당 사상에 찬동한다면 위장하지 말고 올곧게 거기에 서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진보적 캠프에 속한 신념을 찬동하면서 보수적 캠프에 몸을 숨기고 있지 말라는 것이다. 보수적 사상을 찬동하면서 진보적 집단에 소속돼 자기 정체성을 숨기거나 자기보호를 꾀하는 것은 지성인이나 정치인이 해서는 아니 될 처신이다. 그런 짓은 위선자이거나 세작(細作)행위와 같다.

지성인이나 바른 정치인의 정체성과 자존심은 사회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나타내는 사회 측량기와 같다. 자존심 있고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바르게 보이려고 하기(to look right)’보다는 ‘바르게 되기 위해(to be right)’ 노력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대단히 정직하고 평생 바르게 살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게 되는 일생을 가질 확률을 A라고 하자. 한편 한 사람이 남을 속이고 필요하면 언제든지 거짓말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훌륭한(도덕적) 사람으로 평가하게 될 일생을 누릴 확률을 B라고 하자.

이 둘 중에 어떤 삶을 선호할 것인가? 철학자 플라톤(Plato)의 저서인 ‘공화국’(Republic)은 자신의 선을 위해 A의 길을 선택할 것을 권한다. 사회지도자들이 ‘도덕적인 것으로 보이기(to seem virtuous)’ 보다는 ‘도덕적인 인품이 되는 것(to be virtuous)’이 더 바람직하다는 권유이다.

NLL 포기와 관련된 남북정상회담 대화 내용의 진실성 공방이 유령처럼 우리 사회에 떠돌면서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 미궁 속으로 빠지면 우리의 생존이 걸려 있는 안보의 보장이 위기에 처하게 되고,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무너지며, 국민의 자유와 생존의 틀이 위협받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위기로 이끄는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의 총체적 불신은 종국에는 분노한 대중에 의해 무정부상태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치에 대한 실망은 국민들을 극도로 짜증나게 만든다. 상호 불신과 거짓이 판을 치는 불의와 부도덕의 사회를 초래하지 않도록 정치가 바로 서야 한다. 국민들도 정치적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

정치는 지조와 신념을 바탕으로 정치인 개인의 입지와 이익을 넘어 국가와 국민 모두를 위해 미래를 설계하고 운영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정치인들이 바른 이념과 국가관 그리고 올바른 생의 철학과 지조, 폭넓은 지식과 지혜를 갖춰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황의각 편집고문·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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