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무대뽀(無鐵砲) 정신의 말로
일본 무대뽀(無鐵砲) 정신의 말로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3.08.1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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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에게는 다른 나라 국민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심리 구조가 있다.

그 하나가 야마토 타마시(大和魂)라고 부르는, 일본 고유의 민족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를 표방하는 이키노코리라는 심리다.

일본인들의 그러한 두 개의 심리는 묘하게도 대의(大義)를 위해 죽음 앞에 뛰어들면서도 죽고 싶지 않다는 모순된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 다시 말해 ‘죽고 싶어서 죽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죽는다’는 이야기다.

일본인들의 ‘야마토 타마시’ 정신은 특히 사무라이들의 ‘무대뽀’ 정신으로 구현됐다. 무대뽀란 ‘총도 없이 전투에 나간다’는 뜻의 무철포(無鐵砲)를 일본어로 읽은 것이다.

이 말은 16세기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이 들어오면서 일본 막부(幕府)들이 전투에 칼 대신 조총을 사용하게 된 배경으로부터 등장했다. 당시 사무라이들은 무사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조총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카타나’라고 부르는 일본도를 들고 조총부대에 뛰어들었다. 그것이 야마토 타마시(大和魂)였다.

한마디로 개죽음이었고 그런 죽음은 하급무사들에게 ‘살아남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

2004년 NHK에서 방송된 가토리 신고 주연의 대하드라마 ‘바람의 검·신선조’는 대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죽어야 하는 사무라이의 비애를 휴머니즘으로 그린 드라마였다. 아사다 지로의 일본 역사 소설 ‘칼에 지다’가 원작이었던 이 드라마는 이후에 영화로도 개봉됐다.

살아남고 싶다는 욕망

일본의 국민감독 야마다 요지의 사무라이 3부작 ‘무사의 체통(武士の一分)’‘숨겨진 검 오니노츠메 (隱し劍 鬼の爪)’ ‘황혼의 사무라이(たそがれ淸兵衛)’ 역시 칼싸움하는 무협영화라기보다는 하급무사들의 운명과 ‘살고 싶다’는 생의 욕구 사이의 갈등과 애틋한 사랑을 진솔하고 감동적으로 그린 명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 번 패하면 무사(武士)로 죽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일본의 막부 전통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속에서 반막부 세력의 흥기를 불러왔고 700년 막부체제는 무너져 왕정복고의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결국 몰락한 사무라이들은 평민으로 돌아갔고 그들 가운데 식당을 하며 창업에 성공한 이도 있었으니 도쿄 아사쿠사의 하급무사 기타 모토지로가 개발한 ‘돈까스’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돈까스는 행복한 살아남음, 즉 이키노코리였던 셈이다.

하지만 일본 근대화가 일본 무사(武士)들의 무대뽀정신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천황, 즉 텐노헤이까를 상징으로 하는 군국주의의 길을 택했다. 이러한 군국주의에서 일본 ‘무대뽀’ 정신은 다시 그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1940년대 대동아전쟁에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결사항전을 전국민에게 설파하며 ‘1억옥쇄’를 외쳤다. 미군에 맞서 남방 전투에서 일본군들은 탄약이 떨어지자 총검을 꽂고 미군의 기관총 앞으로 돌격했다. 그들은 ‘일본도로는 미군의 셔먼 전차를 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대뽀였던 것.

살아남아 체포된 일본군 병사의 이야기는 가관이었다고 한다. 중일전쟁에서는 그렇게 돌격하면 중국군들은 놀라서 도망갔다는 것. 그러니 미군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는 이야기는 미군들 사이에서 너털웃음을 자아내는 단골 이야기였다.

돌이켜 보면 일본이 러·일, 중·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무대뽀가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일본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단 全병력을 상대국의 한 전선에 집중해서 승리를 얻고나서 협상을 제안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1941년 대일본군 본영에서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하기로 한 결정에도 그런 ‘무대뽀’ 전략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동시에 스탈린의 소련과도 소·일중립조약을 맺었었다.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소련과 연합해 영국·미국에 맞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던 것.

그런데 난데없이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일본은 크게 당황했다. 쉽게 말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게 될 형국이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단

당시 제대로 된 상식적 판단이라면 일본은 독일-소련 외교 협약을 모두 파기하고 중립을 지켜야 했다. 그랬다면 전쟁에 휘말릴 일도 없었다. 일본은 당시 소련과 중립 우호조약을 맺고는 남방 진출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마쓰오카 외무대신은 어전회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당장 소련을 쳐야 한다.”

마쓰오카는 그런 결정을 내리기 얼마 전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과 우호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이었다. 일본은 소련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소련과 전쟁을 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어전회의에서 남방전략의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자 마쓰오카는 이렇게 대답했다.

“영웅은 머리를 전향(轉向)한다. 나는 앞서 남진론을 주장했지만 지금은 북진론으로 전향하겠다. 먼저 북을 치고 이어서 남을 쳐야 한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꼭 소비에트 공격을 단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의다!”

그러다 남방전략이 무산된다는 주장이 나오자 4번 회의끝에 군부 엘리트들은 이렇게 결정했다. “먼저 남방을 치고, 북방도 친다!”
다시 늪에 빠진 중일전쟁은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가 생겼다. 다시 회의끝에 쇼와 16년, 1941년 7월 2일 내려진 결론은 가관이었다.

“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지나사변 처리에 매진하고, 자존자위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남방 진출에 발걸음을 내딛는다. 또 정세의 추이에 따라 북방문제도 해결한다.”

여기서 일본이 남방을 치면 미국이 석유를 금수할 거라는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자 그 결론이 무대뽀의 결정판이었다.

“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對영·미戰을 그만둘 순 없다!”

결국 일본은 중국, 소련, 남방, 미국, 영국을 상대로 모두 전쟁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히틀러의 개헌 수법을 배우자는 일본의 아소 다로, 그리고 전범참배를 주장하며 ‘야마토 타마시’를 외치는 아베 총리는 이 망조의 ‘무대뽀’ 전통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여전히 행복한 생존, ‘이키노코리’를 원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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