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에서 생긴 일
얄타에서 생긴 일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3.08.1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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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기 플로히의 <얄타>를 읽고
 

한국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우크라이나 지명이 있다. 크림반도 흑해연안에 위치한 휴양지 얄타다. 많은 한국인들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는 몰라도 인구 8만의 얄타는 기억한다.

45년 2월 얄타에서 열린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간의 3자회담에서 한반도의 38선 분단이 획정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얄타회담에서 독일 분할점령 계획이 논의되고 확정됐기에 한반도 분할도 이곳에서 논의되고 결정된 것으로 오인한 학자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학설이 정설처럼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97년 여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을 당시 러시아 여행사로부터 여름 휴가지로 제안 받은 곳은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소치였다. 그러나 왠지 내키질 않았다. 구소련 영토를 벗어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2번째 후보지로 얄타를 추천하는 것이었다.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얄타를 선택했다. 초등학교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얄타를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눈 둘데 없던 얄타 해변

얄타에 대한 첫 느낌은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은 달라졌다고 하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시설이 너무 열악했다. 또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얄타회담의 역사적 장엄함은 느낄 수 없었다.

얄타회담이 진행된 리바디아 궁전은 흔히 볼 수 있는 러시아 황제의 옛 휴양소를 개조한 박물관의 하나로 비춰졌다. 관람객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러시아 관광객들은 얄타회담 전시물이 진열된 1층보다는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유물이 전시된 2층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얄타에서의 휴양은 한적하다 못해 다소 심심했다. 함께 휴양 온 한국 기업 모스크바 주재원에게 테니스를 배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 주재원은 테니스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을 정도로 테니스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시 얄타 해변의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아가씨들은 비키니 상의를 입지 않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도 했다.

하루는 러시아 아가씨 2명이 돈내기 테니스 시합을 제안하기에, 선수 출신의 주재원을 믿고 게임에 응했다. 시합은 복식으로 치러졌는데 우리가 일방적으로 패했다. 믿었던 주재원도 계속 헛스윙을 난발하는 것이었다. “아니 왜 그래?”라고 핀잔을 주었더니 “공이 아니라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와서…”라고 변명하는 것이었다.

얄타란 단어를 최근 다시 상기시켜 준 사람은 한 폴란드 보수주의 청년이었다. 올해 3월 영국에서 만난 이 청년은 “얄타는 자유에 대한 배신이며 세계 공산주의에 대한 굴복이었다”고 열변을 토했다.

크라쿠프에서 온 이 청년은 공산정권 시절 공산청년동맹 건물을 ‘레이건 자유센터’로 개명해 폴란드 보수주의 운동 본부로 사용하고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이 청년은 “루스벨트가 소련을 대일전에 참전시키기 위해 동유럽을 팔아먹은 사건이 얄타회담”이라면서 루스벨트와 얄타라는 두 단어에 대해 강력한 적의를 나타냈다.

그럼 얄타회담은 무엇인가? 우크라이나 출신 하버드대 교수인 세르기 플로히(Serhii Plokhy)가 쓴 <얄타>(Yalta)란 책을 읽어 보았다.

 

이 책의 부제 ‘평화의 대가’가 보여주듯 얄타회담은 평화를 위해 서방측이 소련의 동유럽 지배를 확인해 준 사건이다. 여기서 ‘확인’이란 표현이 중요하다. 얄타회담 당시의 갑은 루스벨트나 처칠이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당시 동유럽은 이미 사실상 적군(Red Army)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으며 얄타회담은 이러한 사실을 공식화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즉 동유럽을 구할 ‘실질적 대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이른바 미소협력 체제가 계속 이뤄질 것으로 착각(?)한 ‘얄타 정신’(the spirit of Yalta)이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였기에 더 그러했다.

얄타회담에 임한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 세 사람의 입장은 제 각기 달랐다. 우선 루스벨트가 원했던 것은 첫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질서체제로서 UN을 창립하는 것 둘째, 소련을 가급적 빨리 대일본 태평양전쟁에 참전시키는 것이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미국의 원자폭탄으로 일본의 항복이 앞당겨지지만 45년 2월만 하더라도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소련군의 참전이 절실했다. 반면 스탈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대일본 참전을 미루고 있었다.

스탈린이 원했던 것은 첫째, 국제 강국으로서의 소련의 지위를 인정받고 둘째,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일본전 참전을 미끼로 극동지역에서의 가능한 한 많은 이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요구한 것들

스탈린은 대일본전 참전 조건으로 첫째, 소련의 사실상 속국이었던 외몽골을 인정받고 둘째, 쿠릴열도와 사할린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셋째, 만주철도 운영 참여권과 다롄(大連)항과 뤄순(旅順)항의 권한을 요구한다.

루스벨트는 이 모든 조건을 수락한다. 당사자인 중국과는 아무런 합의도 없이… 한반도의 운명도 이 대목에서 결정되는데 루스벨트는 43년 11월 테헤란회담에서 제의했던 ‘한반도 신탁통치’안(案)을 상기시키고 스탈린은 이에 동의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스탈린의 극동에서의 주된 관심은 만주와 사할린, 그리고 다롄과 뤄순 등 같은 부동항(不凍港)이었다. 또 일본 관동군에 대한 과장된 평가 덕분에 만주와 사할린 장악에 초점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는 그 다음 문제였다. 만주의 관동군이 그렇게 쉽게 붕괴되리라고는 미국도 소련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른바 ‘얄타정신’에 충만했던 루스벨트와 달리 처칠은 소련의 본질과 앞으로 다가올 소련과 대립을 직관적으로 감지한다. 이에 처칠은 승전국 지위에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를 참가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처칠은 개인적으로 드골과 자주 충돌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 감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또 사실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의 군사적 효과는 그리 크지 못했다. 당연히 스탈린은 반대했다. 미국, 소련, 영국이면 충분하지 왜 프랑스를 끼워주느냐는 것이었다.

처칠이 프랑스 를 옹호한 것은 현실주의 국제정치적 관점 때문이었다. 처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위협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미국만 믿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 수뇌부는 소련과의 협력이 전후에도 지속될 것으로 믿는 분위기였다.

또 1차 세계대전 때도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유럽에서 철수해 버렸다. 미국이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손을 떼고 나가면 영국은 혼자서 소련과 맞서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따라서 소련을 함께 견제할 세력으로 프랑스를 선택한 것이다. 사실 군사적 측면에서만 보면 자유 프랑스군보다 자유 폴란드군의 역할이 더 컸다.

영국군 지휘 하에서 대독일전에 참전한 자유 폴란드군만 하더라도 15만에 달했다. 그리고 사실 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대독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본격화된 전쟁이다. 따라서 폴란드 문제는 처칠과 영국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기에 폴란드에서 공산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역부족임을 깨달은 처칠은 폴란드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리스를 요구한다.

지중해 제해권을 유지하기 위한 지정학적 판단에서 그리스의 확보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처칠은 그리스에 대한 영국의 우선권을 요구한다.

그리스 공산당을 배신(?)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당시 그리스 공산당은 매우 강력했으며 영국군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다. 그리스 공산당은 소련 적군의 개입을 기대하나 이미 스탈린은 폴란드를 확보하는 조건으로 그리스를 영국에게 내준 상태였다.

‘독일의 목초지화’ 案

또한 얄타회담은 독일을 4등분하기로 결정한 회담이다. 전범(戰犯) 독일이 다시는 전쟁 강국으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독일을 조그만 소국으로 분리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헨리 모겐소 미국 재무장관은 독일을 낙농국가로 만들려는 ‘독일의 목초지화’(pastoralization of German) 안(案)을 제안했으며 이 안은 원칙적으로 합의된다. 이러한 ‘독일의 목초지화’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훗날 ‘냉전’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소련의 위협을 느낀 미국, 영국, 프랑스가 독일의 중화학공업 재건 및 재무장화를 허용 혹은 장려했던 것이다.

얄타에서 다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냉엄한 국제정치질서와 그 질서를 유지하는 힘의 논리였다. 얄타에서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루스벨트, 스탈린 그리고 처칠 모두 각자가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을 모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유엔 창설과 소련군의 극동참전을, 스탈린은 소련의 강대국 지위 인정과 동유럽 지배권을, 처칠은 프랑스의 승전국 대우와 그리스를 각각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폴란드의 입장에서 얄타는 배신이다. 그러나 이 배신은 회담 이전에 ‘힘의 논리’에 의해 이미 결정돼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재무장화 움직임으로 동북아가 요동치고 있다. 중국, 일본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은 무엇인가? 그 ‘최소한’을 지킬 자신의 힘과 동맹은 준비돼 있는가? 또 중국과 일본을 동시에 적으로 삼아 싸울 수 있는가? 이러한 원론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다가오는 건국 65주년을 맞이해 본다.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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