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마사리크를 아시나요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마사리크를 아시나요
  • 미래한국
  • 승인 2013.09.0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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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 대통령 토마스 게리그 마사리크(Thomas Garrigue Masaryk 1850~1937)와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종종 비교된다.

마사리크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서 1918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불과 4년 만에 선전외교방략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민족을 묶어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시킨 전설적인 인물이다.

마사리크는 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내전에 휩쓸린 체코슬로바키아 반공포로로 연합국, 특히 윌슨 미 대통령과 협상을 벌여 그의 외교독립에 대미를 장식했고 이승만은 한국전쟁의 반공포로로 마침내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 그의 외교정책의 백미가 됐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세계대전과 파리강화회담 내지 국제연맹의 탄생아이고 한국은 2차 세계대전과 국제연합의 결과물이다.

두 인물 모두 청년기에는 기울어져가는 기존질서를 거부하는 개혁가·이단아였고 장년기에는 미래를 내다보고 제자를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노년기에는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제자를 데리고 망명정객으로 외교독립운동을 했다.

개혁가이면서 독립운동

이승만은 책임감이 강한 업적지향의 노력가였고 마사리크 역시 그에 못지않게 절제와 도덕을 강조한 인물이었던 만큼 모두 금욕(금연과 금주)주의자에 높은 뜻을 간직했으면서도 생활은 소박했다.

이승만은 영어사전을 통째로 암기했고 마사리크 역시 라틴어사전을 통째로 암기했다. 두 사람 공히 모국어 이외에 4개 이상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당대의 최고 지성인 가운데 하나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새로운 문물을 알기 위해 영어를 배울 욕심으로 문을 두드렸으며 마사리크는 보헤미아의 낙후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어 공부를 장려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조국의 독립을 믿었다. 이유는 달라도 두 사람 공히 사형선고를 목전에 둔 적이 있었으며 폭력과 무력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자에, 왕조의 해체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가 됐다.

이승만이 한글보급과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국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할 무렵 마사리크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잡지 ‘학술진흥’을 창간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두 사람 모두 독선에 지적 우월감까지 가세해 가는 곳마다 반대파가 등장해 고립됐다. 마사리크에게는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 독립지사들이 사대주의 틀에 갇혀 중국에 또는 이념에 사로잡혀 새로 등장한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부분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지사들이 범슬라브주의에 현혹돼 제정 러시아에 커다란 기대를 건 것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안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모두 이를 탈피, 세계대세를 정확하게 읽고 미국을 이용해 조국을 독립시키려는 외교정책을 밀고 나가 마침내 성공했다. 19세기말~20세기 초 당시로서는 아직 강대국이 아닌 미국의 국제적 지위를 고려하면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

미국을 중시한 혜안

이승만은 줄기차게 중국, 러시아, 일본의 세력균형의 완충장치로서 동아시아 평화에 있어서 한국의 독립이 필수적임을 선전외교를 통해 미국 조야에 역설했고 마사리크 역시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력균형에 완충지로서 유럽 평화에 있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역할을 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특히 미국에 강조했다.

마사리크는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최초의 조직적 저서를 쓴 사람답게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고, 이승만은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을 청년기부터 인식한 터라 모두 반소,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승만이 미국의 개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편승한 것은 마사리크가 미국의 개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기댄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승만은 조국의 존재를 그 역사에서 최초로 대륙세력이 아닌 해양세력 속에서 찾았고 마사리크 역시 시야를 넓혀 모국의 존재를 그 역사에서 처음으로 범슬라브주의가 아닌 전 유럽 내지 세계 속에서 인식했다.

마사리크는 체코 독립운동의 목표를 중부유럽 최초의 민주주의 실현에 두어 미국의 참전목표에 일치시켰고 이승만은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개신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기독교에 기초한 미국건국 정신에 일치시켰다.

이승만을 마사리크와 비교하면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은 마사리크의 정치사상을 체코사상사나 유럽 사상사와 연결하는 연구는 많은데 이승만의 정치사상을 서구사상은 물론이고 조선의 사상 특히 실학사상과도 관계 내지는 연결을 시도한 연구를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의 정치사상인 ‘일민주의’의 뿌리를 조선의 실학과 서양의 근대사상에서 함께 찾고자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한국역사에서 단절됐던 조선의 정치사상과 서구의 정치사상이 연결될 수 있고 그 연결점에서 이승만을 새롭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외교독립 주장의 시대적 배경은 비슷하다. 마사리크는 발칸반도를 둘러싸고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충돌이 필경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외교정책을 소위 ‘제국의 자살’로 내몰 것으로 예상하고 그 기회를 엿보았다.

이승만은 중국을 둘러싼 미국의 문호개방정책과 일본의 팽창정책이 충돌해 마침내 일본이 몰락할 것을 예감하고 그 기회를 포착하는 외교독립의 가능성을 추구했다.

중세 이래 절대주의를 뒤엎은 프랑스 혁명정신의 자유물결이 시간과 함께 고조돼 그 절정에 달한 1차 세계대전이 나머지 절대주의를 해체시켜 그 아래에서 억압받던 유럽의 소수민족들이 자유를 찾아 독립한 것처럼 다음에는 아시아에서도 절대주의가 붕괴돼 소수민족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이 마사리크이다.

그의 전망대로 2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정신을 다시 일으켜 한국의 독립을 자유의 물결의 두 번째 예로 만들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보면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을 거친 자유의 물결이 인류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고 그 끝자락에 한국이 우뚝 설 것을 확신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마사리크의 예견에 동조하고 있다고 본다.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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