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보수주의’를 말한다
‘철학적 보수주의’를 말한다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3.10.0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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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커크의 <보수주의 마인드>(The Conservative Mind)를 읽고
 

미국 보수주의 운동가 양성기관인 리더십인스티튜트(Leadership Institute)에서 주관하는 ‘국제 리더십 훈련학교’에 참가하기 위해 워싱턴DC 근교 알링턴(Arlington)에 와 있다.

오늘(9월 22일)부터 27일까지 6일간 미국 보수주의 운동론에 대해 공부할 예정이다. 리더십인스티튜트는 ‘미국 보수주의운동 사관학교’로 불리는 곳으로 1980년대 레이건 보수주의 혁명의 주역이었던 모튼 블랙웰(Morton Blackwell)에 의해 1979년 설립된 이후 미국 보수주의 운동가의 주요 배출 통로가 되고 있는 기관이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서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놓고 계속 씨름하고 있다. 리더십인스티튜트가 개최한 학습 모임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3번째이다. 지난 2월에는 영국 런던 근교에서 열린 ‘국제 펀드레이징 학교’에 참석한 바 있다.

이때 저녁 만찬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자녀가 몇 명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딸 한 명이라는 대답에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온 보수주의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조금 과장하자면 거의 경악하는 모습이었다. 건강에 문제가 있었느냐고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자칭 보수주의자란 사람이 어떻게 자녀를 1명만 가질 수 있냐는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란 가족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가족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인 만큼 과거처럼 7~8명은 아니더라도 3~4명, 최소한 2명은 낳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다.

보수주의의 정확한 의미는?

한국에서 보수주의란 용어는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사용하는 사람마다 정의(定義)가 제각각이기도 하다. 그나마 최근에 와서 보수주의자라고 내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다행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수주의란 거의 욕에 가까운 말로서 보수주의자들조차도 그 용어 사용을 회피하는 분위기였다.

보수주의란 그냥 과거 질서를 고수하는 수구꼴통일까? 아니면 맹목적 반공주의자 혹은 기득권 수호세력을 가리키는 말일까? 그리고 한국사회에 현실 세력으로서 실재하는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혹시 만약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시장질서’를 부정하는 ‘유교 근본주의자’나 ‘민주질서’를 부정하는 ‘극우 파시스트’도 보수주의자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이 같은 문제에 답하기 위한 예비 작업의 하나로 미국 보수주의에 대해 공부해 봤다. 보수주의란 용어가 혼란스럽게 사용된 것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에서도 보수주의란 용어는 흉물스러운 것이었으며 자신을 보수주의로 규정하는 행위는 정치적 자살에 가까운 것이었다.

훗날 미국 현대 보수주의 운동의 대부로 불린 윌리엄 버클리(Buckley)조차도 당시에는 보수주의란 용어를 사용하기를 꺼렸을 정도였다. 미국 현대 보수주의 운동도 한 사상적 흐름에서 일관된 형태로 태동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중반에 기존의 3가지 흐름을 융합(fusion)시키면서 미국 현대 보수주의 운동이 사상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3가지 흐름이란 1)시장경제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경제적 보수주의(혹은 시장 보수주의), 2) 미국 국내외에서의 공산주의 팽창을 우려하는 반공적 보수주의(혹은 안보 보수주의), 3) 인간 인식론의 한계를 인정하는 철학적 기반 위에서 국가·교회·가족 등과 같은 전통적 공동체 가치를 지키려는 전통주의적 보수주의(혹은 철학적 보수주의)를 말한다.

이질적일 수 있는 3가지 흐름이 이른바 4개 강령으로 융합돼 묶여진 것이 바로 현대 미국 보수주의다. 즉 아래 소개되는 4가지 강령에 동의하는 사람을 현재 미국에서 보수주의자(Conservative)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4대 강령은 첫째, 제한된 정부(limited government)이다. 정부는 ‘알라딘 램프’나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며 정부가 자신의 영역이 아닌 사적(私的) 영역을 침범해 이른바 ‘국민의 행복’을 가져다주려고 할 경우 정부는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는 괴물로 전화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정부의 권한, 특히 경제적 권한은 제한되고 견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의 4대 강령

제한된 정부란 강령은 국가통제경제를 실현하려는 각종 사회주의 경향은 물론, 파시즘과 같은 극우 국가주의 그리고 이와 정반대 입장인 무정부적 자유주의와도 구별된다.

둘째, 자유 기업(free enterprise)이다. 이 강령을 통해 시장질서를 부인하는 봉건적 보수주의와의 차별성이 명확해진다.

셋째, 강한 국방(strong national defence)이다. 제한된 정부가 국가 기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강한 국방만이 제한된 정부도 자유 기업도 보존·유지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다.

넷째, 전통적 미국 가치(traditional American value)이다. 개인의 자유, 국가·교회·가족 공동체에 대한 존중, 애국주의와 같은 미국의 전통적 가치의 고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부 ‘극단적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자’들과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미국 보수주의의 3대 흐름 가운데 반공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보수주의 입장은 한국에 그런대로 소개돼 있다. 그러나 3번째 흐름인 철학적 보수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미국 철학적 보수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은 러셀 커크(Russell Kirk)로서 그의 대표작 <보수주의 마인드>(The Conservative Mind)는 미국에서 보수주의자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 중의 필독서로 간주되고 있다. 초판이 발행된 1953년 당시 저자가 생각했던 원제목은 <보수주의의 완패>(The Conservative Rout)였다.

그만큼 저자 자신조차도 보수주의가 회복하기 힘든 상태에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마지막 ‘남은 자’(remnant)의 입장에서, 자료를 남긴다는 차원에서 저술한 책이다. 책 제목이 바뀐 것은 시장성을 고려한 출판사의 설득 때문이었다. 예상을 뒤엎고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보수주의란 용어를 부끄럽게 생각하던 당시 미국의 지적 풍토를 뒤바꿔 놓았다.

이 책은 영국의 대표적 보수주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Burke)로부터 시작해 토마스 엘리엇(T.S. Eliot)까지의 대표적 영미 보수주의자들과 그들의 보수주의 사상 및 철학을 소개한 책이다.

어찌 보면 에드먼드 버크 철학을 통해 그 이후의 영국과 미국의 철학적 흐름을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철학적 보수주의는 버크적 보수주의(Burkean Conservatism)로 불리기도 한다. 커크는 이 책을 통해 철학적 보수주의의 6개 사상적 규범(canon)에 대해 언급한다.

철학적 보수주의의 6대 규범

첫째, 초월적 질서 혹은 자연법의 본체에 대한 믿음. 이러한 믿음이 양심뿐만 아니라 사회를 규제하며 따라서 정치문제는 근본에 있어서 종교와 도덕의 문제이다. 그리고 좁은 합리성는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없다. 즉 커크는 실증주의나 공리주의적 사고만으로 정치현상, 더 나아가 인간의 문제를 규명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둘째, 확산하는 다양성과 인간 존재의 미스터리에 대한 애정. 이 개념은 좁아지는 획일성과 평등주의, 그리고 공리주의적 목적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공리나 이익이 아닌 삶 자체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입장이다.

셋째, 문명화된 사회는 질서와 계급을 요구한다는 확신. 커크는 무계급 사회에 반대한다. 인간 사회에서 차이란 항상 존재하며 그 차이를 무시하고 자연적 계급을 없애려는 시도는 비(非)자연적 계급을 만들어 낼 뿐이라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신의 심판에서의 궁극적 평등과 법정에서의 평등을 인정할 뿐, 조건의 평등은 부인한다. 조건의 평등은 예속과 따분함을 의미한다는 것이 보수주의자의 생각이다.

넷째, 자유와 소유물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신념. 소유물을 사적 보유로부터 분리시킨다면 국가권력이란 괴물(Leviathan)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경제적 평등화는 경제적 진보가 아니라 경제적 야만을 가져올 뿐이다.

다섯째, ‘당연하게 보이는 오래된 관습’에 대한 신뢰와 사회를 추상적 디자인으로 재구축하려는 궤변가, 계산자, 경제학자에 대한 불신. 관습, 관례, 당연하게 보이는 오랜 관습과 권리가 인간의 무정부적 충동과 혁신자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견제해 준다는 것이다.

여섯째, 변화가 유익한 개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인식. 사회는 바뀌어야만 한다. 그러나 신중한 변화가 사회 보존의 수단이다. 따라서 정치인의 주요 덕목은 신중이다.

덜레스 공항까지 약 13시간 동안 날아가는 내내 머릿속은 온통 커크가 제기한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솔직히 말해 아직 원하는 해답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보수주의 철학의 일부분이나마 맛볼 수 있었으며 혀끝에서 감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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