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 단군신화 못지않게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 아프로디테, 헬레네가 등장하는 신화의 흥미로운 한 두 대목쯤은 누구나 알고 있을 듯싶다.
신화를 직접 읽지 않았더라도 미술과 조각품, 영화나 뮤지컬, 문학작품 등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단편들을 접하는 기회는 많다. 2000년에서 3000여 년 전의 옛이야기인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서양 문명에 끼친 영향이 넓고 깊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의 꽃을 찬란하게 피워냈던 그리스인들의 행동과 사유, 삶을 지배했던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작가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졌다.
그리스 신화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에, 그리고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호메로스와 쌍벽을 이루던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속에, 로마 시대의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 오비디우스의 <변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속에 중첩돼 수록됐다.
그리스신화는 그리스를 넘어 로마에 이식돼 로마신화로 확장됐고 로마를 넘어 장구한 세월 동안 중세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유럽의 12~13세기는 ‘오비디우스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그리스신화의 열풍이 대단했다. ‘유럽(Europe)’의 명칭 이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페니키아의 왕녀 ‘에우로페(Europe)’의 이름에서 나온 것도 신화의 인연이다.
그리스신화의 가치를 근대인들에게 다시 각인시킨 사람은 미국 보스턴 출신의 토머스 볼핀치(1796~1867)였다. 그는 1855년에 <전설의 시대,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출판하여 같은 해 출판된 휘트먼(1819~1892) 시집 <풀잎>과 함께 베스트셀러로 각광을 받았다.
토머스 볼핀치는 산업혁명 이후 과학과 기술의 시대를 맞아 물질문명에 치우친 근대의 세계인에게 그리스신화를 통해 신과 교감하던 고대인들의 정신세계와 인간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과 인간이 빚어내는 모든 현상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동경과 소망을 신화에 투영했다.
자연의 위대한 힘에 무력했던 인간의 삶 속에서 보다 초자연적이며, 성스럽고,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신과 영웅을 보길 원했다. 신화는 바로 신과 영웅들의 놀라운 행적의 기록이자, 인간 사회 삶의 또 다른 방식의 표현이었다.
그리스신화에는 태초의 우주만물의 형성 과정과 인간의 탄생 비사도 담겼다. 또 천상과 인간사회를 주재하는 제우스와 수많은 신들의 사랑과 질투, 분쟁과 투쟁의 이야기로 점철된다. 로마신화는 그리스신화를 그대로 수용했다. 제우스는 실은 주피터였고, 아프로디테는 실은 비너스였다는 식이다.
신화는 허구와 실재가 혼재돼 있다고 봐야 한다. 신화 속에 신과 인간의 희로애락이 어우러졌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현실의 관찰과 상상력의 결합으로 이뤄졌다.
신화 속에서 신은 윤리적 규범과 무관하게 의인화됐다. 그러기에 인간의 욕망과 갈등, 무절제, 도덕규범을 뛰어넘는 일탈을 그대로 투영할 수 있었다.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와 운명에 영웅들은 도전했고 초월적인 능력으로 모험을 완성해냈다.
그리스신화는 인간의 삶을 모방해 한 차원 높은 영적 행위를 보여줬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런 신화에 찬탄하며 신과 영웅의 힘을 빌려 현실의 곤경을 극복하려 애쓰지 않았을까? 그리스신화는 고대 그리스인의 인식의 해방구이자 희망의 충전소가 아니었을까? 과학의 시대, 합리의 시대에도 신화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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