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해탈’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해탈’을 아름답다 했는가
  • 이원우
  • 승인 2013.10.10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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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를 읽는 남자: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최고의 이야기꾼이죠. 김영하 작가의 신작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 베스트셀러 차트에서 선전하고 있습니다. 장편소설로 분류되고는 있습니다만 176페이지의 분량으로 상당히 짧은 작품인데요. 단락 나눔도 굉장히 잘게 돼 있어서 매우 속도감 있게 읽히는 소설입니다. 김영하 작가의 작품, 혹은 최근 나온 한국문학 작품 중 가장 ‘남성적’이라는 평가도 들리네요.

소설의 시점은 1인칭인데 특이한 건 주인공의 경력입니다. 70대의 노인 김병수는 전과는 없지만 살인 경력은 매우 많은, 이른바 ‘프로 살인자’입니다. 집 주변의 대숲에 묻어놓은 무수한 시체들을 회상하며 영화 제목처럼 ‘살인의 추억’에 빠질 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입니다. 심지어 본인이 마지막으로 살해한 사람의 딸 은희를 입양해 기르기도 합니다.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

자신의 죄를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김병수는 다른 누가 아닌 본인 자신과 갈등 구조를 형성합니다.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면서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죠. 문제는 그가 기억을 잃으면 안 되는 상황에 말려든다는 점입니다.

김병수는 딸 은희가 사랑에 빠진 남자 박주태가 살인마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됩니다. 그 남자에게서 떨어지라고 아무리 경고를 해도 듣지 않는 은희를 위해(?) 김병수는 ‘은퇴’했던 전공에 복귀, 그러니까 살인 작업을 재개할 것을 결심합니다. 소설은 이 과정에서 멀어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는 김병수의 내면을 일기 형식으로 흥미진진하게 그려냅니다.

중후반까지는 이 작품의 ‘재미’에 대해서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여줍니다. 다만 이 작품의 후반에는 상당히 강력한 반전이 있는데요.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은 사라져가는 기억에 대한 소설이라고 보면 될 것 같네요.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그 상태를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지 강렬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입니다. 인간을 ‘기억하는 만큼의 존재’라 전제한다면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은 살아 있어도 점차 소멸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상당히 철학적인 주제로까지 연결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품에는 불교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내용이 많이 인용되는데요.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이런 식의 무(無)를 불교에서는 사바세계의 인간이 가 닿아야 할 이상향으로 묘사하곤 하지만, 김영하 작가는 바로 이 해탈에 대한 역발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모두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이 실제로 경험하면 지옥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역(逆)의 폭로가 돋보이는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었습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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