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인생, 북한선교에 쓸래요”
“제2의 인생, 북한선교에 쓸래요”
  • 미래한국
  • 승인 2013.10.2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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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회 세이브엔케이 북한구원기도회 탈북민 증언

양리인 2003년 입국, 한국외국어대 재학

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수용소로 끌려가 지금까지도 생사를 모릅니다. 90년대부터 경제난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고 저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도 당시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굶어죽느니 차라리 중국에 가서 돈을 벌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98년에 두만강을 건넜고 3개월에 한번씩 중국에서 번 돈을 우리에게 전달했습니다. 저도 14살 때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중국 시골에 있는 초가집을 빌려 살았습니다. 교회 근처에 있는 집이었습니다. 거기서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교회에 가면 명절 때 선물을 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큰 차 세 대가 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바로 산으로 도망쳐 간신히 체포를 면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동네 누군가가 저희를 신고한 것이었습니다. 매일 그렇게 불안하게 살 수는 없기에 아버지는 한국으로 보내주는 중국 브로커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가던 중 브로커가 먼저 중국 공안에 잡혔고 우리도 다롄역에서 중국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게 2003년 초 겨울이었습니다.

북송돼 감옥에 들어갔는데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꿇어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식사는 한국의 개죽보다 못했습니다. 추운 감방에서 배가 고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나는 하나님께 제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기적과도 같이 아버지를 병보석으로 내보내줬고, 비록 송장을 밖에서 치우라는 의도였지만 저는 기도응답이라 믿었습니다. 이후 다시 미련 없이 북한을 버리고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7월에 다른 브로커를 만나서 다시 한국행 길에 올랐습니다.

기차에서 공안의 신분증 검사에 걸려 또다시 잡혀 북송될 위기에 처했는데 같은 기차칸 안에 아버지가 예전에 있던 회사의 중국인 사장이 우리를 알아보고 돈을 건네 우리를 풀어주는 기적 같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한국에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국외대에 입학했습니다. 재정적 문제도 있었고 학업도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수없이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작년에는 교육부와 미 국방부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에 뽑혀 8개월간 미국에 가게 됐습니다. 미국에서 4개월의 어학연수와 4개월의 인턴을 마쳤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이제 제겐 더 큰 꿈이 생겼습니다. 북한의 문이 열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그곳에 전하는 것과 통일 과정에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중국과 북한에서는 저보다 어린 아이들이 꿈도 희망도 없이 지냅니다. 많은 아이들이 인신매매로 팔려가고 착취당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을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도울 수는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176회 세이브엔케이 북한구원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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