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려, 음식끝에 정난단디, 니 마음은 시방 워디 가 있다냐?”
“그려, 음식끝에 정난단디, 니 마음은 시방 워디 가 있다냐?”
  • 미래한국
  • 승인 2003.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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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익의 국토기행⑮ 자연과 예술에서 배어나는 맛 - 온고을(全州) 음식
미적 감성이 유별난 이들이 가꾼 값진 문화유산뮌헨 맥주축제도 콩나물국밥집 분위기만 못해불안한 겨울의 끝자락을 잡고 전주에 갔다. 이른 아침 서울역에서 여수행 새마을호를 탔다. 동료 교수의 교장 취임식에 같이 가자고 어찌어찌 하다보니 ‘기차 타고 전주 가는’ 어색한 행차가 되고 말았다. 부지런한 천 학장이 일행의 차표를 샀는데, ‘그럼 커피는 내가 산다’고 재치부린 김 학장 덕에 얼렁뚱땅 공짜 신세가 되었다. 정 교수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더니 기어이 일행을 식당차로 끌고 갔다. 온 국민이 나라가 벌인 복권 판에 취해 있지만, 이처럼 사소한 일상으로 즐거워하는 이들이 있다. 잔설이 남은 산등성이, 텅 빈 들판, 안개속에 엎드린 마을들을 스치며 일행의 화제는 한가한 리듬을 탄다. 낯익은 카페에서 묵은 포도주를 앞에 둔 연인들처럼 순서도 한계도 없이 마냥 흘러간다. 머무르는가 하면 떠나고, 다시 돌아오면 장르가 바뀐다. 가끔씩 차창에 스치는 풍경이 가까워지면, 안단티노(andantino)는 알레그레토(allegretto)로 넘어가고, 시대도 현실로 다가온다. 세 시간 남짓한 시간이 순식간에 가버렸으니 이건 대박인가, 소박인가? 전주에 남는다는 내 말에 모두가 “참, 좋겠오!”란다. 당대를 풍미하는 과학자에 음악가, 정치학자들이 그리도 부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전주는 우리나라의 음식 문화를 대표한다. 음식이 그러하고, 그릇과 상차림과 내는 맵시가 그러하다. 음식을 장만하는 법도와 정성이 지극하고, 장소의 분위기가 다르며, 권하고 내주고 얹어주는 맘씨가 또한 유별나다. 거기에 곁들여 천년을 다듬은 소리가 있으니, 오래고 높은 명성을 다시 말해 무엇하랴. 전주백반이라고도 불리는 한정식을 ‘잘 하는 집’으로 전주 사람들은 숨도 안 쉬고 여남은 개의 상호를 줄줄이 읊어 댄다. 대부분이 도청 부근의 오래된 집들이다.놋그릇에 앙증스레 담아낸 호박죽이 입맛을 돋운다. 하얀 도자기에 곱게 돌린 화전은 차마 먹으라는 건 아닐 게다. 수삼냉채가 상큼하고, 시금치 즙으로 색을 낸 밀전병에 구절판과 신선로는 자리가 상전이고 모양이 의젓하듯이 맛도 은근하다. 홍어찜이라기에 얼마나 삭힌 것인지 물어 보는데, 삼합은 벌써 쟁반 위에서 어울린다. 다슬기탕은 담백하고, 민물새우탕과 조기매운탕은 매큼한데 뒷맛이 달짝지근해 안주로 제격이다. 두릅무침의 향내에 일본 손들이 놀랐다지. 겉절이와 생굴이 싱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나는 이치는 아무래도 알 수 없다. 잡채에 우엉채를 섞고 잣가루를 뿌리면 씹히는 소리까지 재미있고, 김부각은 바삭거리다 혀끝에서 녹는다. 두툼한 붕어찜은 입힌 옷이 화려하고, 맑은 물에만 산다는 모래무지 찜은 쏘는 맛이 일품이다. 구수한 너비아니, 짭짤한 참게장을 필두로 어리굴젓, 조개젓, 진석화젓, 토하젓, 더덕장아찌가 갖가지 김치와 볶음과 지짐, 졸임에 무침까지 밑반찬을 이끌고 있다. 밥은 놋그릇에 담아 한결 희고 따뜻하며, 여기선 시래기 국도 부드럽다. 감칠맛이 오래 남는 동애전과는 순창 것으로 만들었단다. 서양 디너로 말하자면 식후에 내는 초콜릿 같은 것인데 그 발상과 맵시와 맛, 어느 한가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새큼한 석류화채로 입을 깔끔하게 가시고 나니, 비로소 노랫가락이 들리는구나.처음 상이 나왔을 때부터 차린 음식의 그릇 수를 세다가, 접시 위에 줄줄이 다시 접시들이 포개지는 걸 보면서 그만 두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깨달았다. 학창시절 국화빵 많이 먹기와 짜장면 빨리 먹기 시합을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아직 얼마나 유치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가! “아따, 그, 한 잔 쭈욱 하시오, 잉!” 차가운 놋술잔에 비친 내 속이 복분자보다 더 빨갛다.세상에 누가 갖은 양념을 해서 찌개를 끓이고 탕을 만드나? 그리고 세상에 어떤 다른 민족이 밥을 채소랑 고기와 함께 비비나? 뜨거운 돌솥밥 위에 칠색나물이 가지런히 시침떼고 둘러앉았다. 가운데 빨간 육회와 달걀 노른자가 색채와 냄새와 소리, 그리고 촉감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이제 맛을 볼 차례인데 이를 어쩌나? 젓자니 아깝고, 두고 보자니 밥이 눌어 들어간다. 그보다 입에 침이 고이는 걸 자꾸만 삼키는 것도 점잖지 못하고. 맑은 콩나물국이 곁들여졌다. 몇 가지 밑반찬이 따라 나오지만, 안면치레일 것이다. “젓가락으로 비벼야 헌당게!” 주눅들지 않고 먹어보기 위해 친구들까지 따돌렸는데, 천려일실인가? 둘러메고 다닌 큼직한 카메라 때문이었다. 그래도 핀잔이라기보다는 살가운 말 붙임이다. 비벼서 놋그릇에 담아 내는 옛날 식 전주비빔밥을 못 먹은 것은 유감이다. 비빔밥 맛이란 어차피 분석하는 게 아니다. 각각의 재료 맛을 음미하면서도 섞여 어울려 나는 새로운 맛이 또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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