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욱 뻥카 사건, 그 이후
채동욱 뻥카 사건, 그 이후
  • 이원우
  • 승인 2013.10.28 18: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적인 마무리’가 불러온 치명적 나비효과들
 

흔히 광고를 만들 때 세 가지 요소를 넣으면 반드시 시선을 끌 수 있다고들 한다. 귀여운 동물. 예쁜 여자. 다음은 뭘까. 어린 아이다.

사람들은 어린 아이가 나오면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다 보면 얼마쯤 손해를 보더라도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거다. 어떤 면에선 치졸한 전략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매출은 올라가니 아쉬울 땐 기댈 수밖에 없다.

김구라와 강용석이 이미지를 회복한 방법

방송인 중에서 이 전략을 가장 잘 써먹은 사람으로 김구라를 꼽는 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엽기’가 영원한 유행으로 남을 줄 알았던 김구라 등 3인은 구봉숙 트리오를 결성해 평생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대표작 ‘대한민국을 조진 100인의 개새끼들’).

김구라가 주류 연예계로 진입하자 그에게 욕먹었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꿔 요즘엔 오빠 형님하면서 아주 사이가 좋아졌다. 연예계란 그런 곳이다.

다만 시청자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불편함을 없애는 일이 남았는데, 여기에는 김구라의 아들 동현 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귀여운 그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그래, 김구라도 다 먹고 살려고 한 짓인데 뭐 그렇게 쫀쫀하게 굴 거 있겠어. 본심은 아니었을 거야.’ 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누군가 김구라의 과거 발언(혹은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문득문득 간담이 서늘해진다. 꽤 재미있는 그의 지금 방송이 10년 전의 개그도 뭣도 아닌 인격살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스릴러 못지않게 소름 돋는다.

사람들은 김구라라는 ‘인간’이 좋아서 그의 방송을 보는 건 아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 주는 그를 보며 잠시 기라성 같은 연예인들을 발아래 두었다는 느낌을 즐길 뿐이다. 연예인이 대통령보다 더 높은 ‘연예인 공화국’의 뒷면이기도 하다.

김구라의 개그에는 날카로움이 있을지언정 페이소스는 없다. 배터리가 닳으면 가장 먼저 내다버릴 소모품 같은 웃음. 그런 웃음밖에 주지 못하는 인간의 말년은 불행하고 외롭기 십상이지 않을까(내 알바 아니지만).

최근엔 김구라와 ‘썰전’으로 마음을 나눈 강용석이 아들을 대동해 JTBC의 갖가지 프로그램에 나서고 있다. 김구라 콤비와는 달리 강용석 부자는 너무 닮아서 굳이 누가 옆에서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아들인 걸 알 수가 있으니 이보다 좋은 효과가 또 없다. 시청자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래, 강용석도 한 집안의 가장인데….’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채동욱은 선을 한참 넘었다.

‘사망유희’ 자초한 건 채동욱이다

조선일보가 채동욱의 혼외 아들 건을 1면으로 보도한 건 9월 6일의 일이었다. 이 날은 금요일로 주말동안 출근하지 않는 한국인들이 여러 가지 추측과 감상을 내놓기에 최적의 시점이었다. 사람들의 감상은 복합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①잘못은 잘못이다. ②그러나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의 결정적인 실수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검찰총장이라는 직위가 무거워서 그렇지 혼외아들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소재다. 혼외자식이 있다는 ‘썰’로 칠 것 같으면 전직 대통령이며 유명 배우도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들에게 그런 과거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역사에서 지워버린다거나 하진 않는다.

팔로워 160만 명을 호령하는 국민 멘토가 혼외아들에게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소송에 휘말리며 ‘사사오입’의 정의를 새로 쓴 것 또한 지난 4월의 일이 아닌가(師事誤入: 멘토가 부정을 저질렀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대(代)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부적절한 선택을 한 한국인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채동욱은 조선일보 보도가 나가자마자 지나치리만치 딱 선을 그으며 ‘사실무근’임을 주장하면서 시작부터 프레임을 대결 구도로 만들었다. 조선일보가 사기꾼이거나 채동욱이 사기꾼이어야 끝나는 ‘사망유희’가 시작돼버린 것이다. 결국 TV조선이 가정부 여인과 접촉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게임은 조선일보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한쪽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슬슬 동정론이 일기 시작했다. 채동욱의 가슴 아픈 개인사와 고통당하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자는 여론이 일어난 것이다. 채동욱이 검사시절 몇몇 인물들의 숨통을 끊어놓았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입장에선 균형감각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 채동욱 스캔들이 뉴스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사람들이 그의 소식을 듣는 데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퇴임식에 불러선 안됐을 사람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모습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채동욱은 30일 퇴임식장에서 해선 안 될 선택을 했다. 10대의 딸을 포함한 가족들을 현장에 초청한 것이다. 그래놓곤 퇴임사에서 한다는 말이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였다.

도대체 이게 역대 최악의 ‘뻥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마지막 순간까지 법적‧도덕적으로 순결한 사람이 되기를 도전하는 건가? “나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는 유명한 거짓말쟁이 이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이제 와 별로 반추하고 싶지 않은 채동욱 사건을 재차 언급한 이유는, 적정한 선에서 끝내는 게 옳은 거라 믿고 철면피의 역할극을 받아준 대가를 우리가 벌써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호의무사를 자청하며 채동욱의 뒤를 따르겠다고 했던 김윤상 검사의 표정을 떠올려보자. 니들이 뭔데 우리만의 견고한 나와바리에 손을 대냐는 듯한 그 당당한 얼굴이 바로 현재 일부 검사들의 표정이다.

어디까지나 일부이긴 하겠지만 이 ‘분노한 소수’가 이제 뭐 하나 마음에 안 들면 다 외압이고 검찰 흔들기라고 주장하기로 했다는 건 윤석열 검사의 경우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가족까지 끌어들이며 끝까지 쇼를 펼친 채동욱에게 마지막 인간적인 동정심을 품은 대가로 우리는 검찰의 수준을 일정부분 포기해 버린 셈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했던가. 야만으로 가는 길은 휴머니즘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