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FK가 살아 있었다면…
JFK가 살아 있었다면…
  • 미래한국
  • 승인 2013.11.2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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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stion Hanging Over JFK's Presidency: What if He Had Lived?
도널드 커크 편집위원·전 뉴욕타임스 특파원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11월 22일 사망한 지 50주년을 맞으면서 한가지 큰 질문을 해본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는 무엇을 이룩했고 또 어디에서 실패했을까?

이 질문들은 그가 죽은 후 2년 뒤부터 동남아시아, 주로 베트남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내게는 매우 적절한 질문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린든 존슨이 했던 것처럼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참여를 확대했을 것인지를 두고 많은 의견이 있다. 린든 존슨은 존 F. 케네디가 텍사스 달라스에서 총에 맞아 죽으면서 대통령직을 갑자기 승계할 때까지 부통령 자리에 매우 실망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美 베트남전 참전시킨 최초 대통령

우리는 한가지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베트남전에 미국을 참전시킨 최초의 장본인이 케네디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베트남 공산군대의 남부 계열인 베트콩이 고딘 디엠 남베트남 대통령의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맹렬하게 펼치자 미국 특전부대 요원을 파병한 것은 케네디의 결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이 1965년 그렇게 했던 것처럼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미국 정규군을 베트남에 파병했을까? 아니면 베트남전은 가망이 없다며 자신이 사망하기 3주전에 암살당한 디엠 대통령을 지원하던 미군을 철수시켰다면 어떠했을까? 반대로 미군의 참전을 확대해 북베트남으로 북진, 호치민 정부를 쓸어버리라고 명령했으면 어떠했을까?

모든 사람들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듯하다. 미국 진보는 잘 생기고 활기가 넘치며 진보적 민주당원이었던 존 F 케네디는 그 전쟁을 승리의 가능성이 없는 수렁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은 존 F. 케네디는 영리해서 미국이 무기와 자금을 공급했던 사이공 정부와 군대를 구하는 타협을 이끌어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노이가 군대를 강화하고 주력 부대를 남베트남으로 보내기 시작할 때 JFK가 어떻게 했을지 보여주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공화당 선임자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개선한 장군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분명히 밝힌 견해인 ‘도미노 이론’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도미노 이론은 베트남이 공산주의 손에 들어가면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비롯,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국가들도 ‘도미노’처럼 공산주의에 넘어갈 것이라는 견해다.

프랑스가 누더기 옷을 입은 소작농 군대의 공격 쯤은 너끈히 막아낼 것이라고 믿었던 베트남 북서부의 요새인 디엔비엔푸에 대한 공산주의 군대의 공격이 임박해오자 아이젠하워는 이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된 1954년 5월 7일 프랑스는 항복했다. 그해 7월 제네바에서 협상자들은 북위 17도선을 따라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분단하자고 합의했다.

이 제네바 협정은 1년 전 양측이 싸움을 멈춘 휴전선을 따라 한반도를 분단시키기 위해 판문점에서 체결한 협정과 매우 유사했다. 제네바 협정은 미국과 소련이 2차 세계대전 중 인위적으로 한반도에 그은 38도선을 따라 위아래로 펼쳐진 지역과 같은 휴전 지역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반도에서는 1953년 정전협정이 계속됐지만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북베트남의 전폭적 지원과 중국, 소련의 무기 공급으로 세력을 키워가자 이 제네바 협정은 결렬됐다.

 

쿠바 공격 승인한 케네디

존 F. 케네디는 약 1000일간의 재임 중 강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줬다. 정말 그랬을까?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3개월 뒤인 1961년 4월 그는 CIA의 후원 아래 반공주의자 쿠바 망명자들로 구성된 1개 여단이 쿠바를 공격하는 ‘피그만’ 작전을 승인했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이 시도는 처참한 실패였다. JFK가 대규모 공습을 명령하고 미군 파병을 고려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중도주의자들은 미국이 전쟁에 뛰어드는 것을 반대했다.

JFK는 18개월 뒤인 1962년 10월에는 성공했다. 소련 서기관인 니키타 흐루시초프를 향해 쿠바 땅에 세운 미사일들을 철수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13일 뒤 미국이 터키와 이탈리아에서 소련을 겨냥하고 있던 모든 미사일을 철수시키고 쿠바에 대한 봉쇄를 풀자 흐루시초프는 케네디의 말을 따랐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JFK의 강함과 흐루시초프의 약함을 보여준 증거로 인용되고 있다. 이 사태로 2년 뒤 흐루시초프는 강경파인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여전히 질문은 남아 있다. “JFK가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그는 베트남에서 전쟁을 확대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북베트남에서 미국의 승리를 보장할지 모르나 한국 전쟁처럼 중국의 개입이 초래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아니었을까?

박정희가 피그만 대실패 후 한달 뒤인 1961년 5월 16일 케네디와 같은 모든 리버럴 미국인들이 신봉하는 민주주의 원칙들에 반대되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케네디는 다행히도 1000일 간의 재임기간 중 한반도에서 다른 위기에 직면하지 않았다.

번역/이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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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복 2013-11-25 12:53:48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