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일본의 전범 재판 영화들
독일과 일본의 전범 재판 영화들
  • 미래한국
  • 승인 2013.11.2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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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문의 스크린 뒷담화
 

다시 재판 이야기. 세상은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법이 있어야 사는 사람이 더 많다. 힘 있고 권력 있는 상대를 만나더라도 따지고 시비할 수 있는 것은 법이 있기 때문이다. 법정의 사연은 그대로 세상 풍경의 축소나 다름없다.

하지만 전쟁 범죄를 다룬 영화들에 이르면 사실과 허구, 진실과 평가 사이에서 혼란스럽다. 독일의 전범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단죄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 비해 일본은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자세가 독일과는 완전히 다르다. 전쟁에는 졌지만 책임은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영화들은 많지만 그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전쟁이 협상으로 마무리되고 정치적 결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재판을 다룬 영화 중에서 전쟁 범죄를 다룬 전범재판은 몇 편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의 주요 책임자들을 기소한 뉴렘베르크 재판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군벌들의 핵심 인물을 단죄한 도쿄재판이 대표적인데 정작 영화로 재현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재판 자체가 법리 공방으로 이어지는데다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함수를 전제하지 않으면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주요 이유가 아닌가 한다. 사실로서는 엄중하지만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만들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전범 영화 소재 - 뉴렘베르크 재판, 도쿄 재판

전쟁의 역사는 오래지만 그것을 범죄행위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전쟁에 대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 문책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 대한 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때 쯤에 이르러서야 윤곽을 잡기 시작했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된 두 나라간의 전쟁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개입하면서 확전을 거듭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터키, 일본, 미국까지 참전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번졌다.

제국주의 시대, 각국의 복잡하고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고 동맹과 이탈을 거듭하며 4년여를 계속하던 전쟁은 1918년 11월 11일을 기해 끝났다. 긴 전쟁이 끝나자 전승국들은 세계 평화를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프랑스 베르사이유에서 진행된 연합국과 독일제국 사이의 조약은 베르사이유 조약 또는 제1차세계대전의 평화협정으로 불린다.

당시 조약에 참가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표들은 각각의 평화구상을 조약에 담았다. 전쟁의 중심국 역할을 했던 독일제국과 그 동맹국들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적시했고,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2세가 그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할 처지가 됐다.

그러나 황제는 조약이 발효되기 전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연합국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신병 인도를 거절했다. 연합국들은 승리의 대가로 영토, 외교, 군비 등 여러 분야에서 배상을 요구했고 독일제국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쟁을 잔혹한 범죄행위로 인식하는 시각이 더 강화되는 계기가 됐는데 1945년 8월에 이르러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사이에 유럽의 추축국 수뇌 범죄자의 소추 및 처벌을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 그것을 근거로 전쟁범죄자 처벌을 위한 국제군사법원이 설치되었다.

 

재판 종결 한참 후에 나온 전범 영화들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의 설립에 관한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특별성명서’와 17조로 구성된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에 따라 1946년 1월 19일에 설치된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인도, 네덜란드, 필리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10개국에서 참가한 10명의 재판관과 30명의 검찰관을 임명했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28명의 주요 전쟁 책임자들을 기소했다. 공정한 재판을 진행한다는 명분으로, 28명의 기소자들에게는 1명씩의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도록 했고 2명의 미국 측 변호인이 참가했다. 5월에 3일부터 심리가 시작됐고 48년 11월 12일에 선고를 마쳤다.

재판 도중 외무상 출신의 마쓰오카 요스케, 연합함대장과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나가노 오사미는 사망했고, 도쿄대 출신의 학자였던 오가와 슈메이는 정신이상 진단을 받고 재판에서 제외됐다. 나머지 25명 중 도조 히데키 등 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문부대신 등을 역임하며 일본 국민의 사상개조 교육에 앞장섰던 아라키 사다오를 비롯한 16명에게는 종신금고가 언도됐다.

영화 ‘뉴렘베르크 재판’(Judgement at Nuremberg, 1961)은 실제 재판이 끝나고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나온 영화이며 그나마 극적으로 변형한 영화여서 전범 재판을 소재로 다룬 수준. 2000년에 뉴렘베르크 재판을 다룬 TV 미니시리즈 ‘뉴렘버그(Nuremberg)’가, 2006년에는 ‘뉴렘버그: 나치 재판( Nuremberg: Nazis on trial)’가 각각 등장했다.

도쿄재판은 1983년에 와서야 ‘격동의 쇼와-동경재판’(激動の昭和史-東京裁判)이란 다큐멘터리가 일본에서 등장했는데 전범들이 전쟁의 책임자이며 역사적 잘못을 했다는 시각은 별로 없다. 승전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된 재판이었다는 식의 분위기가 묻어난다. 이어 2007년에는 TV 영화로 ‘동경재판’을 만들었는데 일본의 국수적 인식을 더 강조한다.

이보다 한해 앞선 2006년 중국에서 동경재판을 다룬 ‘동경심판’(東京審判)이 극영화로 나왔다. 군국주의 일본을 비판하는 분위기를 담았지만 널리 소개되지 않은 탓에 한때의 영화로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일본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에게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질 때가 많다. 그때 일본의 천황을 전쟁의 책임자로 규정하고 재판에 회부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조희문 편집위원
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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