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힘
충청의 힘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3.12.0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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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4월 충청도에서 때 아닌 녹색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환경보호운동이 아니라 총선의 정치바람이었다. 그 바람의 이름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었다. 이 바람은 영남 대 호남이라는 지역주의 정치 대결 과정에서 벌어졌다.

“충청도 사람들이 신당을 만든다는데, 충청도 사람들은 핫바지냐?” 이렇게 말한 이는 작고한 김윤환 민자당 의원이었다. 그러자 JP 김종필이 발끈했다. “호남사람들은 푸대접이라도 받는다. 충청도는 아예 무대접이었다. 충청도가 왜 핫바지가 돼야 하느냐.”

JP의 이런 ‘충청도 핫바지’론은 일거에 충청지역 민심을 강타했고 자민련이라는 제3의 정당을 출범시켰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김종필이라는 인물을 충청권의 정치적 맹주로 만들어 흔히 ‘3金시대’라고 부르는 지역구도 정치가 전개되는 계기가 됐다.

충청도의 표심은 이후 DJP연합으로 1997년 김대중 민주당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켰으며 2002년에는 충청권 행정수도를 이슈로 내건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당시 충청 출신임을 강조했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했다.

영호남 양강 구도인 한국정치에서 충청권은 캐스팅보트를 가졌다. 하지만 독자세력화에는 늘 한계가 있었다. 지난 11월 14일 충청 출신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은 헌법소원을 제출했다. 충청권 인구가 호남을 추월했고 또 계속 늘고 있는데 의원수는 적으니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는 것이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충청권 의원들의 지지가 잇따랐다.

충청 인구가 호남 인구를 넘어서게 된 것은 지난해 7월 세종시의 정부종합청사가 완공돼 여러 정부 부처가 그곳으로 이전하면서 많은 인구가 유입됐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밖에도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된 기업과 공공기관이 수도권 규제로 인해 서울에서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이전하게 된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충청권 의석수가 호남권 이상으로 늘면 당내 또 원내에서 충청권의 영향력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충청권 여야 의원들은 연일 비례대표 감축을 통해 지역구 의석 확대 방안을 논의하는 등 충청권 의석수를 늘리기 위한 본격적인 공론화에 나서고 있다.

 

의석수와 영향력의 상관관계

정 의원이 제출한 헌법소원에 의하면 현재 충청권 인구는 526만8000여명인데 국회의원 숫자는 25명에 불과한 반면 충청권보다 인구가 적은 호남권 국회의원 숫자는 30명에 이른다는 주장이다.

헌법소원은 “이는 충청권 국민의 참정권 제한 및 헌법상 평등 원칙 위반”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난달 기준 주민등록상 충청권 인구는 526만8108명으로 호남권(525만979명)을 추월했다. 헌법소원이 주장하는 법리는 ‘균등한 기회 보장’이다.

청구서에는 ‘현재의 선거구 획정은 헌법 제11조 평등권, 헌법 제25조 공무담임권, 제24조 선거권에 위배될 뿐 아니라 헌법 전문에 규정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국회의원 숫자를 늘리지 않고 의석수를 조정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호남의 의석수를 줄이는 것과 비례대표 의원수를 줄여 충청권 의석수에 배정하는 방식이다. 헌법소원을 제출한 정 의원은 호남권 반발을 의식한 듯 호남을 예로 들었는데 호남의 의석수를 줄이자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비례대표를 줄이자는 이야기가 된다.

충청권 의석수의 확대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과 민주당 모두에게 당권과 관련된 복잡한 계산을 요구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 입에서는 벌써 ‘충청권 대망론’도 나온다.

지난 11월 12일 충청권 지역구 의원들과 고향이 충청권인 의원들이 ‘충청권 모임’을 열었다. 모임에서 “캐스팅보트를 넘어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새누리당의 경우 내년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이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점 때문에 충청권 거물 의원들의 당권을 향한 치열한 각축전도 예상된다.

선거에서 위력 발휘한 충청표

도대체 ‘충청의 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기에 이렇듯 몇 개 충청 지역구 확대를 놓고 정치권이 요동에 빠져 드는 것일까.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안다. 한마디로 충청권의 캐스팅보트는 역대 대선에서 ‘결정적’이라 할 만했다.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김대중 총재는 79석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당시 김대중 총재의 정책참모기구였던 아태재단의 상임고문인 이강래는 호남 고립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연합하는 방안을 보고서 형식으로 조언한다. 김대중 총재는 이를 적극 수용하고 96년 중반부터 자민련과의 정책 공조를 추진하기에 이른다.

DJP연합은 단순한 정치적 연합이 아닌 정치적 성향이 상반됐던 김대중-김종필의 연합이었다는 점에서 그 정치적, 사회적 효과는 컸다. 한마디로 ‘적과의 동침’이라 할 만 했는데 김대중 총재는 이를 위해 영국의 거국내각, 독일의 신호등 연정 등 다양한 사례를 조사해 이론적 근거를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자민련은 표면적으로는 김종필 총재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3개 계파로 나뉘어 있었다. 김종필 총재의 친위 세력이었던 충청계, 김영삼 대통령의 견제에 밀려 탈당한 TK 민정계, 그리고 중립파였다.

 

충청계의 수장은 김용환 부총재였고 TK 민정계의 수장은 박철언 의원, 중립파의 수장은 한영수 부총재였다. 중립파와 충청계 대부분은 DJP연합에 부정적이었으나 TK 민정계는 DJP연합에 매우 찬성하는 입장이어서 박철언 의원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강삼재 신한국당 의원이 김대중 총재의 ‘20억+알파’라는 정치 비자금 사건을 터뜨렸다. 새정치국민회의는 일촉즉발의 비상이 걸렸고 김대중 총재는 이에 김종필 총재에게 대대적인 정치적 양보를 하게 된다. 김종필 총재는 공동정부를 구성하는 대가로 대선 후보 자리를 양보하고 충청표를 몰아주기로 약속을 했다.

그 일로 인해 김대중 후보의 색깔 시비가 무력화됐고 김대중 후보는 1992년 대선에서 얻은 804만 표에 무려 228만 표를 더해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렇다면 자민련은 무엇을 얻었던가.

당시 DJP연합의 공동합의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하고 초대 국무총리는 김종필 총재로 한다. 둘째, 제16대 국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합의하며 실세형 총리로 한다. 셋째, 경제부처의 임명권은 총리가 가지며 지방선거 수도권 광역단체장 중 한 명을 자민련 소속으로 한다.

‘핫바지’가 됐던 JP와 자민련

이 약속은 첫 번째 외에는 지켜지지 않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국민의 뜻’을 내세웠다. ‘충청도 핫바지’를 거부했던 김종필과 자민련은 결국 ‘핫바지’가 됐다. 자민련은 그 후 분열의 길로 접어 들어섰다.

2002년 대선의 길목에서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다시 민주당 노무현측과 야합하는 기회주의 행태를 보였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노무현의 좌파 이념에 반대해 민주당을 탈당한 이인제 의원이 자민련 총재권한대행으로 자리를 옮겨 새누리당 이회창 후보 지지를 당론으로 결정하고 선거에 공조하려 했지만 김종필 총재를 비롯, 충청지역에서 친노와 결탁한 세력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에 하는 수 없이 이인제 의원은 개인적으로 이회창 후보에게 지난 대선불복을 사과하고지지 선언을 해야만 했다. 당시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는 선거 전날까지 당선을 예측할 수 없는 혼전을 치르고 있었고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이를 공약으로 채택했다.

반면에 이회창 후보는 이를 반대했다. 그로 인해 충청권의 민심은 약 6:4 정도로 노무현 후보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헌재에 의해 위헌판결이 났다.

이로써 행정수도 대신에 기업도시로 충청권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대안적인 주장들이 있었지만 결국 신행정수도 건설로 여야간에 합의됐다. 그렇게 수도 분할로 태어난 세종시는 태동부터 잘못된 설계로 수천억 원의 국민혈세를 낭비하고 있는 대표적인 부실 행정으로 지목되고 있다.

충청의 지역감정으로 일어선 자민련은 보수이념을 지지했다. 자민련의 반공·보수 이념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자민련의 충청 지역주의에 시비를 거는 이도 없었다. 이 말은 자민련이 이념 정당이라기보다는 기회주의 정당의 성격이 더 강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여러 번 그 당명을 바꾸고 재건에 노력했지만 충청 지역주의에 기반한 정당은 다른 지역으로 그 세를 넓힐 수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 정치 전문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충청지역의 이념적 성향이 비균질하다는 점을 든다. 이념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지역적 특성이 강한 곳이 경기와 충청이라는 점은 과연 충청의 의석수를 늘린다고 우리 정치 지형이 변할 것인가라는 의문를 자아낸다.

이는 바꿔 말해 충청지역의 의석수가 늘더라도 충청지역이 정치적으로 분열돼 있다면 충청의 ‘핫바지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충청지역의 정치성향은 진보나 보수 어느 한 쪽으로 정립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0월 국내 여론조사 미디어리서치의 조사에 의하면 충청지역의 새누리당 지지율은 약 43%로서 민주당 22%보다 약 2배 더 높았다. 현재로서는 보수적 정치 성향을 보이고 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충청의 민심은 ‘선거함을 열어봐야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여론조사가 적중했던 2012년 총선

그런 공식은 사실 지난 19대 총선에서 깨졌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충청 민심은 여론조사와 거의 부합하는 선거 결과를 보여줬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은 18대 총선에선 충청권 전체를 통틀어 1석 확보에 그쳤지만 2012년 19대 총선에선 25석 가운데 12석을 차지해 대약진을 했다. 눈길을 끄는 점은 부동층이 지역에 기반한 선진당에 표를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당시 선진당 고위 당직자는 “충청 유권자들은 대권주자가 보이지 않는 정당에 의미 없는 표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충청을 이용하려는 세력을 배척하는 게 충청민들의 자존심”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그렇다면 충청의 민심이 앞으로도 새누리당을 마냥 지지할 것이라 보는 견해는 순진할 것 같다.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충청권의 민심은 ‘박근혜’였을 뿐이다.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폐기 추진에 맞섰던 것이나 공식 선거운동 기간에 대전을 3차례, 충남을 2차례 찾은 것에 대해 충청인들은 박근혜 후보에게 53%라는 높은 지지율을 보여줬다. 하지만 문제인 후보에게도 43%라는 지지율을 보냈다. 충청권의 의석 확대로 충청권의 민심이 지역 이기주의를 더 조장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 이유다.

2009년 대전일보는 창간 59주년을 맞아 충청지역의 정치의식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당시 설문조사는 한밭대, 한남대와 여론조사전문기관인 한국갤럽에 맡겨 하루 동안 수도권에 사는 충청인 504명을 대상으로 했다.

항목별 조사결과 ‘충청도 하면 가정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로 ▲‘양반’(27.6%) ▲‘느림’(10.5%) ▲‘충절’(7.3%) 순으로 답했다.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치인은 3김 시대가 막을 내렸음에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3명 중 2명(63.9%)으로 압도적이었다. 그 다음으로 이회창(12.9%), 이인제(5.6%), 심대평(3.8%), 이완구(1.2%)가 차례로 손꼽혔다.

충절의 고장 충청도에서 JP의 정치적 유산은 여전히 막강하다. 그런 JP가 이제 현실정치에서 멀어졌기에 충청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이번 충청권 의석 확대는 보통의 일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누구든 제2의 JP를 꿈꾸는 한, 충청도 핫바지론은 결코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충청인들의 정치 이념의 방향성이 정립되기 전에는 말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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