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국회 폭력, 그리고 갱들
좌익, 국회 폭력, 그리고 갱들
  • 미래한국
  • 승인 2013.12.03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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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역사는 사칙연산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그런 것은 아니다. 최소한 고차방정식이며 굳이 비유하자면 복잡계다. ‘역사 발전의 법칙’이니 하는 따위의 말을 문학적 수식 이상의 진짜 과학적 법칙으로 믿는다면 사실 바보다. 산수를 수학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 같은 게 그런 거다.

물론 역사는 꽤 자주 공간을 넘어서는 동시대성을 연출하거나 시간을 넘어서는 동질적 반복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에는 어떤 법칙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겠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 자체가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것의 재확인일 따름이다. 어떻든 때로 펼쳐지는 전형성을 보여주는 어떤 역사적 장면은 계속해서 재음미되기 마련이다. 거기에 ‘거울’이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도 그런 시대다.

1920년대는 끼어 있는 시대다. 일단 戰後, 그리고 혁명직후였다. 1차 대전이 막 끝났으며 러시아엔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그 여파로 유럽에서 세 개의 왕관이 떨어졌다. 독일의 호엔촐레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러시아의 로마노프 세 왕가가 역사의 뒷길로 퇴장했다.

베르사유 체제라는 전후질서가 수립되고 독일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하지만 정치는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좀체 안정을 찾지 못했다. 동쪽발 적색물결이 유럽 전역을 넘보는 가운데 특히 바이마르 체제의 독일은 혼란을 거듭했다.

그래도 경제는 일시 전후 부흥의 호황을 맞았다. 대서양 건너 미국이 중심이었다. 독일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악명 높은 인플레 사태는 사실 일시적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나름 꽤 흥청대기도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 왔다. 1929년 대공황이었다.

전쟁과 혁명, 그리고 공황까지

1920년대의 가장 특징적인 양상은 역시 정치였다. 적색혁명과 좌우 투쟁 그리고 고삐 없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의 씨앗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격돌의 현장이었다. 바이마르 체제는 어쨌든 일단 ‘자유’가 모든 면에서 만개했다. 무책임하고 방만하고 퇴폐적일 정도로 그랬다.

독일의 구지배층과 보수적 중산층은 이 바이마르 식 ‘자유’를 서유럽적 타락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한편에선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서두르고, 이것은 또 다른 극우적 반발을 불렀다.

폭력적 충돌 조짐이 일었고 곧 그렇게 됐다. 폭력적 행동은 우익이 아니라 좌익이 먼저 시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스파르타쿠스단’의 무장봉기 시도였다. 이를 무력 진압한 쪽은 우익이 아니라 사회민주당 정권이었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폭력은 이제 좌우를 넘어서 있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기반을 흔들었다. 하지만 극좌파들은 헌정을 수호하는 대신 여전히 폭력으로 그것을 부수는 데 몰두했다. 1920년 경 루르 지방에서 5만 명의 노동자로 이뤄진 ‘붉은 군대’가 만들어지고 곧 그곳 전체가 그 손아귀에 들어갔다. 군대가 출동하고 격렬한 전투 끝에 루르를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탈환했다. 내전이었다.

이런 과정이 거듭되자 극우적 대응폭력 조직들이 대거 등장했다. 좌우의 충돌이 거리를 휩쓸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정권은 이를 수습하는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무책임에 무능이 겹치고 바이마르는 독일 국민들과 더 멀어져 갔다.

좌파 문화인들과 모더니즘의 도발

거리에선 점차 우익이 우세를 점해갔다. 그러나 문화계는 달랐다. 범좌파가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치적 색채를 제외하면 당시 바이마르 체제의 독일은 문화적 황금기였다.

1920년대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편수는 나머지 유럽국가 모두에서 만들어진 것보다 많았다. 하지만 바이마르는 모더니즘과 전통주의가 충돌하는 문화적 전장이었다. 그 문화적 전쟁이 거듭되면서 ‘올바른 사고’의 독일인들은 분노를 더해갔다.

좌파 지식인들과 문화인들은 독일의 보수적 중산층들의 증오심을 자극하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는 듯했다. 성적인 자유를 찬미하고 고의적인 반역적 언동도 서슴지 않았다. 마치 지금 한국의 좌파 헤게모니하의 문화 지식계의 데자뷰다.

한편 좌파 문화인들은 퇴폐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폭력을 동경했다. 극작가 브레히트가 공산주의에 매료된 것은 사실상 폭력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그는 미국의 갱 문화에 끌렸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제복’을 손수 디자인했는데, 가죽모자, 철테 안경, 가죽코트로 이뤄진 최초의 좌파의상이었다.”(폴 존슨 <모던타임스>)

잠시 시선을 돌려 대서양을 건너가 보면 미국의 1920년대는 갱들의 전성시대였다. 정치적 폭력의 시대는 아니었으나 거기에도 폭력이 만개해 있었다. 다시 멀리 극동 일본으로 가도 폭력이란 요소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1920년대의 大正 데모크라시 시대의 일본은 한편으로는 나름 정치적 자유가 개화해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속은 완전히 곪아가고 있었다. 정치적 부패가 만연해 있었으며 온갖가지가 정치적 이권으로 거래됐다. 정당은 합법적 마피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한편 극심한 정치폭력이 난무했다. 의회 안에선 난투극이 다반사였으며 정적 제거를 위한 암살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 일본 관방장관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범죄자라고 불렀다. 역사적 평가를 떠나 그런 식이라면 일본의 1920년대는 그 이상 가는 정치적 범죄자들이 창궐한 시대였다. 민간의 우익결사가 우후죽순 등장하고 폭력과 살인이 도처에서 횡행했다.

나중의 일본 최대 야쿠자의 뿌리가 된 겐요샤(玄洋社 현량사)도 그런 정치깡패 집단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제대로 처벌을 받은 자들은 거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찬미를 받기 일쑤였다. 일본의 군국주의라는 국가폭력은 바로 그런 정치폭력의 무법시대를 거치며 예비된 것이었다.

폭력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파괴했다

1920년대, 가히 폭력의 시대라 할만 했다. 유럽에서 극동 일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랬다. 러시아에선 적색 테러가 휩쓸었고, 독일에선 좌우익이 폭력적 격돌을 거듭했다. 그런가 하면 바다 건너 미국에선 갱들이 톰슨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좌익과 깡패정치와 갱들이 함께 전성기를 구가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전체주의의 씨앗이 증오를 거름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물론 나치즘이든 파시즘이든 모두 그 폭력적 본질에선 볼셰비키와 하등의 차이도 없었다. 하지만 좌익의 난동이 없었다면 그리고 자유주의에 회의를 품게 만든 방만함이 없었다면 전체주의가 그렇게 성공을 거두긴 어려웠을 것이다. 나치즘의 승리는 우습지도 않게 일종의 좌우합작에 의한 것인 셈이다.

강기정 민주당 의원이란 자가 청와대 경호원에게 폭력을 휘두르고도 적반하장으로 큰소리를 치고 있다. 국회에서 쇠톱과 망치까지 들고 설치던 걸 생각해보면 차라리 애교다.

그런데 이들의 이런 깡패정치는 ‘그들끼리’에선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범야권 더 정확하게는 한국의 범좌파 진영의 폭력적 행태는 어제 오늘이 아니다. 정당에서 노조 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갖가지들이 폭력적 완장질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다른 한편 문화적으로는 온갖 방만과 방종의 진원지 노릇을 하고 있다.

1920년대 바이마르 시대를 연상케 한다. 깡패 좌익들과 방종분자들의 완장을 박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 역사의 교훈이다.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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