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악마를 보았다!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3.12.2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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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준의 Book & World: 블라디미르 티스마네아누의 <역사 속의 악마>(The Devil in History)를 읽고
 

지난 11월 22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하 정구사) 소속 박창신 신부의 ‘강론’ 내용을 전해 들은 건전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신부의 강론 내용은 단순한 반정부 발언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반역의 선동’이었다.

사실 정구사가 이러한 반역적 행위와 발언을 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구사 소속 문규현 신부는 98년 평양통일대축전에 참가해 김일성 시체가 안치된 금수산 궁전 방명록에 “金(김)주석의 永生(영생)을 빈다”는 글을 남긴 바 있으며, 그의 친형인 문정현 신부는 2002년 5월 경북대 ‘제1기 통일아카데미’ 강연에서 “나 역시 북한을 방문하였을 당시 만경대에 가서 ‘김일성 장군 조금만 오래 사시지 아쉽습니다’라고 썼다”고 발언했다.

또 2003년 이들은 KAL 폭파범 김현희는 가짜이며 대한민국 정부의 조작이라고 단정했다. 이에 노무현 정권 당시 거액의 국가예산을 투입해 재조사한 결과 모두가 사실임이 재차 입증됐음에도 불구, 사과하기는커녕 자신들의 ‘거짓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사제복을 입은 마귀”

정구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정치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인이라고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니 상황에 따라서는 사회에 대해 ‘정치적’ 선포를 해야만 할 때도 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의 대대적 항일운동 참여 등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는 ‘세속적 가치’가 아닌 ‘신앙적 가치’에 기초해야 한다. 즉 신앙 자체가 탄압을 받고 있거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생명과 자유가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있거나, 다른 정치적 수단이 모두 봉쇄돼 ‘교회’ 이외에는 저항 수단이 존재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직접적 정치적 참여는 자제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 생각한다.

그런데 정구사는 신앙 자체가 부정당하고, 생명과 자유의 가치가 말살된 북한 체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아니 지지 발언을 일삼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악무한적 증오감을 표출하고 있다.

사실 이들 정구사 소속 신부들이 신앙인인지 그 자체가 의심스럽다. 명동성당 입구에서 정구사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나눠주던 한 천주교인은 정구사 신부들을 “사제복을 입은 마귀”라 표현했다. 다소 과격해 보이지만 이 표현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마귀, 혹 사탄은 누구인가? ‘타락한 천사’이다. 그 천사는 왜 타락했는가? 바로 자신이 신(神)이 되거나,

신(神)이 된 것처럼 행세하려 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진리를 모두 알고 있기에 그 진리를 바탕으로 지상천국을 현실의 세계에서 건설해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가 이 세상에 뿌려졌던가?

이러한 교만을 바탕으로 거대한 사회공학 실험이 ‘공산주의’란 이름하에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세계 도처에서 자행됐으며 이 실험은 모두 대학살과 가난, 그리고 인간성의 황폐화로 끝나 버렸다.

최근 모임에 나가면 가장 많이 듣는 개인적(?) 질문 중의 하나가 “왜 언제 어떻게 전향했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럽다. 우선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막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상 전향’ 과정은 녹록한 과정이 아니었다.

한 마디 혹은 짧은 시간에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과정이 아니었다. 몸서리쳐지며 뼈를 깎는 고통을 맛본 뒤에 이뤄진 ‘전향’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과정도 짧지 않았다. 짧게 잡아도 5년, 넉넉하게는 10년 이상의 세월의 방황과 고민 속에서 이뤄졌다.

전향의 첫 계기는 소련의 현실이었다. 붕괴된 소련의 현실은 기존의 관념을 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습지만 소련 사회가 이상향은 아닐지라도 현존하는 사회 가운데 가장 우수한 체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흔히 북한에 가 보면 북한 현실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북한을 방문하고 와서도 북한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필자도 1990년 첫 소련 방문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소련을 찬양하고 다녔다. 외부인이 잠시 구경만 하고 돌아갈 경우 현실은 현실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외부인의 이념적 거울에 반영된 형태로만 투사된다. 즉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게 된다.

물론 단순 방문이 아니라 현지에서 생활할 경우에는 조금 달라진다. 즉 북한의 경우도 잠시 방문하고 돌아온 형태가 아니라 현지인과 똑같은 환경에서 6개월 이상 생활해 보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쉽지 않았던 전향 과정

필자는 1991년 2차 방문 이후 소련에서 생활을 해나가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현실의 사회주의에 다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소련 관료들의 잘못된 실천 때문”이라고 자위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은 현재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간혹(!) 들을 수 있다. “현실 공산주의는 잘못됐지만 공산주의 사상에는 좋은 점도 많다”라는 식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또 “마르크스주의는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상으로서 훗날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왜곡됐으나 그 유산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주장이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세속주의적 인본주의의 극단적 형태’, 바로 이것이야말로 ‘악마의 이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깨닫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념과 부합되지 않은 소련 현실에 애써 눈을 감으며 이로 인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를 극복하기 위해 소련 경제사를 공부했다. 필사적이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 면벽수도하는 수도승의 자세였다. 아무리 파고들어도 메워지지 않은 간극이 너무 넓었다. 아니 이 간극은 더 벌어졌다.

이때 한 러시아 대학원생이 건네준 조야한 갱지에 러시아어로 등사된 하이예크의 <치명적 자만>이 그토록 고민하던 간극을 날려 버렸다. 신앙으로서의 마르크스 경제학이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준비하던 논문은 어느 겨울날 러시아 다차의 페치카 속에서 불쏘시개가 돼 버렸다.

마르크스주의 유령은 끈질겼다. 경제학 이론은 파산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내재된 인본주의적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었다. 지금 와서 생각건대 단순히 이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요소였던 것 같다. 대학입학 이후 인간관계는 매우 단순해져 있었다. 운동권 인맥을 제외한다면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삶의 의미를 상실했던 고뇌의 시절

이들과의 관계를 무조건 단절한다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실존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행위였다. 다행히(?) 이들과의 단절은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1994년 탈북자 문제를 취재, 월간조선에 기고한 것이 계기였다.

이때 옛 동지와 친구들로부터 받은 많은 수모와 곤욕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주사파 뿐만 아니었다. 주사파와 대립적이었던 PD계열도 필자를 맹비난했다. 정말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실질적 위협을 맛보았다. 이 사건으로 고민하던 인간적 관계 문제는 자연히 해결됐다.

마침 서울이 아닌 물리적으로 머나 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던 점도 단절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마침 경제적 여건도 좋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쉽게 돈 벌수 있는 일이 당시 구소련 지역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 현장에서 외국기자 취재를 돕는 일이었다. 철학적 허무주의 속에서 화약 냄새는 그리 독하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크지 않았다. “죽으면 그만인데”라는 무신론적 허무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선과 악에 대한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히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역사적’ 산물일 뿐이었으며, 인간이란 유한한 ‘물질’의 다른 형태일 뿐이었다. 아무런 위안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마약을 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술에 절어 살았다. 기존의 도덕적 준거는 내면에서 붕괴된 상태였다. ‘현실의 소돔과 고모라’를 목격했다. 삶의 의미를 상실했던 것이다. 남은 것은 두 가지 길이었다. ‘힘에 대한 의지’(will to power)만을 맹신하며 살든지, 아니면 삶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이해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분쟁지역에서의 경험은 인간 본질에 대해 새로운 도전을 안겨줬다.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 아니 ‘자연 상태의 인간’과 맞부딪쳤다. 인간의 한계와 본성이란 화두와 치열하게 싸웠다. 아니 고독과 허무가 문제였다. 이렇게 방황하던 도중, 신(神)과 재회하게 된다. 대학 진학과 거의 동시에 버렸던 신을 다시 만난 것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환상’으로 깨어나게 됐다. 인간의 의지만으로 인간 세상을 지상낙원으로 만들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바벨탑 쌓기였으며, 아담과 이브의 실낙원(Lost Paradise)의 문제가 바로 인간이 신처럼 되고자 하는 헛된 교만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극단적 형태의 인본주의였던 공산주의”와의 최종 결별이 이뤄진다.

 

루마니아 정치 이론가 블라디미르 티스마네아누의 <역사 속의 악마>는 손에 잡자마자, 일사천리로 읽어나간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티스마네아누는 20세기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을 일반적인 독재 혹은 권위주의와 엄격히 분리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형태로 등장한 20세기 전체주의는 “악마의 이론”이다. 신(神)이 아닌 인간이 역사의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이론과 실천의 결합, 바로 이것이 “악마의 논리”였다. 초월적(transcendent) 도덕관이 붕괴된 상황 속에서 인본주의적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선과 악을 편익(utility)에 의해서만 구분하게 만든다.

그리고 ‘역사’(History, 반드시 대문자로 표기해야만 하는)에 대한 ‘신앙’으로 무장된 혁명가들이 현실세계에서 ‘신의 나라’(the City of God)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류를 개조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실천해 나간다.

공산주의라는 악마의 이론

결국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을 표면에 내세웠지만, 결국 “정치적 종교”(political religion)였던 것이다. ‘대문자 역사’가 신(神)을 대체하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역사의 육화(incarnation)’가 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도와 “역사적 지혜와 합리성의 담지자”인 당(黨)이 인간 및 사회 개조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초기에는 ‘합리성’(rationality)을 앞세우며 인본주의적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적자(赤子)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초월’(transcendence)을 필요로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었다. 결국 스탈린은 ‘원시적 마술’(primitive magic)을 사용해야만 했다. “대(大)러시아 애국주의”에 호소해야만 했던 것이다. 어쩌면 스탈린이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다른 볼셰비키 인텔리보다 뛰어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악마가 보통 인간보다는 인간 본성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이성으로만 인간을 재구성하려던 다른 볼셰비키들의 시도는 모두 좌절됐다.

이러한 전체주의, 특히 공산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에서 이탈되어 원자화된 군중들의 아미노 상태” 덕분이었다. 이들 ‘혁명적 군중’은 “원시공산주의 상태에 대한 향수” 속에서 자신을 보호할 ‘유모’를 찾게 된다. 그리고 ‘초월’을 상실한 이들에게는 ‘마술’이 필요했다.

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보수주의자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 “개인(Individual)의 발견”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문제는 ‘군중’(mass)을 구성하는 인간들이 ‘개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은 영적인 인간(the spiritual person)”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도덕적 가치’, 혹은 ‘초월적 가치’는 결코 공리주의적 편익이나, 의무론적 도덕관에서 나오지 않는다. 또 그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시민사회’(civil society)가 굳건히 설 때만 그 사회는 전체주의로부터의 유혹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 19세기 자유주의의 한계가 자리매김 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현대 리버럴리즘’(modern liberalism)이 ‘19세기 고전적 리버럴리즘’로부터 이탈, 변질돼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성과 초월이 결합돼 있는 것이 인간이 본질이란 점을 망각할 경우 언제든지 악마로부터 유혹당할 토양이 제공되는 것이다.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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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복 2014-08-15 23:27:15
1994년 처음 교회에서 만나
내가 기거하는 아빠트에서 숙식하며
최초로 탈북자 명칭을 정하고
탈북자문제를 특종화시키는 기사를 쓰시던 시절이 어제 같네요.
그때는 술좋아하고 신앙이 없는 듯했는데...출로를 찾으셨네요.
나도 유엔난민1호로 서울에 들어와 신학대학원을 다녔고
최초 민간인으로 풍선을 개발하여 폐쇄가 특징인 북한땅에 진리를 보내고 있지요.
아무튼 뜻이 있으면 어디서든 만나다더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