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로 인해 안녕하지 못한 한윤형 기자님께
나의 글로 인해 안녕하지 못한 한윤형 기자님께
  • 이원우
  • 승인 2013.12.24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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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이원우 기자의 재반론 칼럼
한윤형 기자의 반론 기사가 실린 '미디어스'

* 이 글은 이원우 기자의 칼럼 <나는 안녕하다>에 대한 미디어스 한윤형 기자의 반론 기사 <“별 일 없이 산다”와 “안녕들하십니까”>에 대한 재반론 칼럼입니다.

- 반론을 쓴다는 건 굉장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그 에너지를 바쳐 내 글에 대한 반론을 짧은 시간에 집필하신 한윤형 기자님께 진심의 감사를 전한다. 아마 ‘나는 안녕하다’를 가장 열심히 읽어주신 분은 한 기자님이 아닐까 싶다.

- 그런데. 글이 너무 길어서 솔직히 읽기 벅찼다. 공백을 제외하고 6,032자. A4 6매 분량이다. 원래 이런 스타일이신가? 재반론은 A4 2매로 끝내도록 하겠다. 줄이는 것도 기술이다.

- ‘나는 안녕하다’는 완벽한 글이 아니다. 제목부터 그렇다. 안녕한 사람이 글을 쓰겠나? 안녕하지 않은 뭔가가 있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쓰는 거다. 그런데도 내가 이 글에 ‘안녕하다’는 제목을 붙인 건 그 표리부동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내 메시지에 동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한윤형 기자는 후자인 모양이지만, 그 표현이 너무 식상한데다 길기까지 하다. 지금은 글을 쓰지만 진짜 꿈은 교장선생인가? 한윤형 기자의 칼럼 처음부터 소제목 <‘천년 후의 역사책’이 쓰인다면...> 이전까지의 내용은 결국 두 문장으로 요약가능하다. ①나는 (너의 글이 아닌) 너라는 인간이 싫어 ②나의 세계가 너의 세계보다 우월해.

- 두 줄이면 끝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한윤형 선생님은 일면식도 없는 이원우 기자의 배움 수준과 먹물 여부를 추측하거나 미래한국의 운영비까지를 머릿속에서 계산한다. 이원우도 모르는 이원우와 미래한국도 모르는 미래한국이 한윤형 기자의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라 활동 중이다. 꿈속의 그들이 감기는 안 걸리고 안녕들 하신지 문득 궁금해진다.

- 나름 열심히 읽었는데 “그런 식으로 논쟁을 한다면 너무나도 소모적이지 않을까?”라고 말해서 한순간 허탈해졌다. 반론은 한윤형 선생님이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천년 후의 역사책’이 쓰인다면...>부터는 그나마 재반론할 가치가 있는 부분이 나온다.

- <이원우 기자는 ‘북한을 생각한다면 너희들 입닥쳐야 한다’는 자신의 논지가 지나치게 무리하단 걸 스스로 자각했는지 너절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 변명이 이 글을 ‘더 먼 은하계’로 날려 보낸다. (…)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통일이 되기 전엔 우리 중 누구도 안녕할 수 없다’로 치닫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이해나 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안녕하다고 우기면서 시작된 글이... 이러시면 곤란하다.>

- 일단 ‘입 닥쳐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허수아비의 오류. 주목하고 싶은 건 한윤형 선생님의 문장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이해나 한다”이다. 정말로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한 선생님이 ‘이해나’ 해줬을까? 천만에.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아마 이 글은 ‘더 먼 은하계’에서 읽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 그나마 장기하의 BGM이라도 깔았으니까 한윤형 선생님께서 공사다망한 일정을 뒤로 하고 A4 6매 분량의 반론을 작성하실 기세로 글을 열독한 거다. 내 글은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덕에 독자(교장 선생님 포함)를 얻어 심판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 이른바 ‘어그로’에 불과한 전략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남쪽만 보고 북쪽은 바라보지 않는 오십견 같은 현실을 꼬집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힘을 내셔야 할 선생님은 “우리는 모두 안녕하다고 우기면서 시작된 글이... 이러시면 곤란하다”라며 아버지의 뒷모습 같은 말줄임표를 찍는다. 아니다. 바로 여기부터가 선생님께서 힘을 내셔야 할 부분이다.

- <그리고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통일이 되기 위해선 남한 사회 누구도 안녕할 수 없으며 건국도 완료되지 않았다’는 견해는 사실 그네들이 ‘종북주의자’라고 칭하는 NL운동권들의 견해와 동일하다. (…) ‘뉴라이트 할아버지’들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한다고 혼날 텐데, 저쪽 동네도 어지간히 의견통일 안 된다.>

- 피장파장의 오류. 그런데 ‘저쪽 동네’를 내가 있는 동네로 해석해도 된다면, 정통 자유주의(Libertarianism)와 보수주의(Conservatism)를 지지하는 우리 동네에서는 의견 통일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가치는 아니다. 의견은 일치보다 불일치가 기본이기 때문이다. 한윤형 선생님이 계신 ‘그쪽 동네’에선 의견통일 같은 무시무시한 가치가 그렇게 중요한가? ‘뉴라이트 할아버지’보다 훨씬 무섭다.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라면 맞는 말 앞에서 아무도 혼 안 낸다. 무서워 마시길. 할아버지들은 한윤형 선생님의 머릿속이 아니라 3차원 현실에 있다.

- <북한의 위협이 있고 통일의 필요성이 있는데, 그래서 어쩌잔 말인가? 북한에 관심을 어떤 방식으로 가지란 말인가?>

- 나와 동갑이신 한윤형 선생님의 이 두 문장은 중요하다. 사실은 이 문장이야말로 북한에 대한 2030의 입장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힘든데 뭐 어쩌라고.’

- 어쩌긴. 1년에 6000만원 넘는 소득을 올리는 철도노조원들을 무려 대학생들이 걱정해 주는 남한의 휴머니즘을 10분의 1만이라도 쪼개서 북쪽에 투사하면 된다. 관심이 많은 걸 바꾼다. 대자보도 결국엔 그 얘길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 이후부턴 가상 시나리오에 기초한 훈화 말씀이 다시 이어진다. 내가 하지 않은 얘기들이 대부분이다. 다시 한 번 허수아비의 오류. 이 많은 허수아비들은 어디서 왔을까. 하지만 뭐, 그래도 다 좋은 얘기들 같다.

- 대자보 논쟁이 작은 싸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각자의 우선순위를 놓고 싸우는 ‘세계관의 격돌’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끼리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논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는 좀 짧고 재미있게 부탁한다. 그건 ‘자신이 모르는 고통을 겪는 이들에 대한 예의’를 따지기 이전에 눈앞에 있는 논쟁 상대방과 독자들에 대한 예의다. 한윤형 선생님과 나는 이 논쟁을 지켜봐 주는 사람들의 시간을 지루하게 만들 만큼 대단하지 않다. 그렇다면 글이라도 잘 읽혀야 하지 않겠는가.

- “안녕을 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니 인사를 건네 본다. 메리 크리스마스. 사랑의 날을 앞두고, 나름 재밌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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