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종교
민주주의와 종교
  • 미래한국
  • 승인 2014.01.1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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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보는 눈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어원은 헬라어 demos(the people) 백성이라는 말과 kratos(power, dominion) 힘, 주권의 합성어다. 즉 힘의 근원이 백성에게 있다는 뜻이다. 자기를 뽑아준 백성들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정치 제도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오늘날과 같지 않게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했다. 인구 1만명도 안 되는 도시국가에서 대의정치제도는 필요하지도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인구의 대다수가 노예들이나 여성으로 구성된 고대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이 동등하게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위대한 아테네에서도 원주민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다. 로마도 비록 비로마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그리스와 비슷한 제도를 갖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인종에 대한 정책은 신이 정한 것으로 이해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을 들고 대항했지만 로마제국은 참정권을 엄중히 제한했다.

민주주의 구현은 오랜 세월이 걸려

중세 종교개혁 이후 인본주의의 발전과 르네상스 운동을 거치는 동안 정치적 사회적 평등권이 강조됐다.

잉글랜드의 왕정에 대항한(1642년) 찰스 1세의 법령으로 유럽의 군국주의(autocratic) 정부가 민주정부로 바뀌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이전에 서방국가들의 왕정들이 왕권을 제한하고 정치권력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다. 영국 국회에서 법 앞에서 평등, 보통선거권, 교육평등권이, 그리고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생존권, 자유, 행복추구권이, 그리고 프랑스에서 인권선언, 법 앞에서 자유와 평등권이 주장됐다.

20세기 중반에 세계 모든 독립국가들이 - 몇 개의 예외가 있지만 그리고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은 나라도 있지만 - 민주주의 형태는 갖췄다. 미국에서도 여성들이나 문맹자들이 참정권을 갖기까지는 12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이뤄졌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 위기론을 부르짖는 이들이 있다. 1948년 5월 30일 UN 감시하에, 해방된 우리나라는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국회를 세우고 행정부를 그 해 8월 15일에 세워 건국의 기쁨을 맛보았다.

많은 문맹자와 여성들이 투표에 참여키 위해 출마자의 이름 위에 막대기를 그려 기호로 읽게 하고 소위 보통, 비밀 선거를 하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탄생케 했다. 성인 남녀노소 모두가 참정권을 행사해 헌법을 만들고 그 법 앞에서 평등하고, 자유와 행복 그리고 인권을 누리며 사는 질서 있는 법치국가를 이루고 있다.

이데올로기와 종교

2차 세계대전 후 우리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의 싸움에 휘말려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보다는 그 속에 깊이 파묻혀 있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드 뜨라시(Destutt de Tracy)가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1801년 그의 책 <이념의 학>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이해가 마르크스나 엥겔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경제계획, 여성해방운동, 환경보호운동, 이 모든 것들은 그 규모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모두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론적 뒷받침이 있는 행동 강령들인 것이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종교가 인간 행동의 방향과 규칙을 결정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휴머니즘도 기독교의 유산임이 틀림없다. 평등사상은 성경의 사상 중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계몽주의는 초자연적 종교적 권위에 항의함으로써 인간 이성과 지각이 인간 행동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종교는 이제 추방당한 것이다.

종교 권위 대신 인간 지식의 권위가 왕좌를 차지했고 종교적 행동 규범 대신 이데올로기가 등장한 것이다. 종교를 허황된 인간 두뇌의 산물인 이데올로기로 무시했고 그것을 가능케 한 하부구조 즉 경제적 사회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즉시 종교는 없어질 것으로 막스는 보았다.

이데올로기 비판자로서의 종교

종교는 아직도 독단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중요한 비판자가 되고 또 그렇게 할 능력을 가졌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비판은 아무 힘이 없다.

그러나 종교는 이론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비판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종교는 이념의 체계가 아니고 이념 자체의 정당성에 근거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신앙에 근거해 있고 모든 이론적 체계는 부차적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비판해도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다.

만일 종교적 확신이 이 세상의 이념 체계에 근거해 있다면 그리고 궁극적 세계가 이 세상이라면 그것은 가장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전락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초월세계를 상실한 종교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고, 다른 이데올로기를 초월적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한다.

현대 이데올로기는 위기에 놓여 있다. 이데올로기의 상대성과 잠정성이 계속되는 비판에 의해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미 쇠퇴했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도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처럼 다른 대안이 나올 때까지는 최선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겠지만 절대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상황 따라 흔들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초월종교의 목적은 전체적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폭로하는 비판적 역할과 전 사회에 고귀한 목적과 가치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 역할은 종교 스스로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지 않는 한 가능하다.

이종윤 상임고문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
서울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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