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노조에 빼앗긴 87년 체제
귀족노조에 빼앗긴 87년 체제
  • 미래한국
  • 승인 2014.01.1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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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낮은 단계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한 만큼 받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높은 단계가 되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받게 된다”고 했다. 공산주의의 분배원칙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이다.

공산주의의 첫 단계인 사회주의 시기는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로부터 막 생겨난 때인 만큼 “일한 만큼 받는다”는 ‘자본주의적 불평등’이 아직까지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1875년 <고타 강령 비판>에서 라살레주의를 비판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는 이미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 이상 가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능력만큼 일하지도 않으면서 노동한 것 이상으로 받아 챙기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이런 특권에 더해 자기 자식들에 일자리를 물려주는 ‘세습’의 권리까지 누리려 한다.

일부일 뿐이라고? 이번에 파업 소동을 벌인 철도노조만 그런 게 아니다. 현대차노조 등 민노총 소속의 거대 노조들 다수가 단체협약에 일자리 세습 조항을 집어넣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감자료에 따르면 단협을 공개한 공공기관 179곳 가운데 33곳이 일자리 세습 조항을 갖고 있다. 세습귀족! ‘노동귀족’이다.

그런데 일자리를 물려줄 노동귀족 아비를 두지 못한 청년백수들 상당수가 철도노조 귀족 아저씨들의 파업을 지지했다고 한다.

귀족노조는 바보가 있어 즐겁다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치면서 자기 일자리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자들에게 박수를 보낸 것이다. “뇌 송송 구멍 탁” 바보들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서 생긴 증세가 아니다. 그건 못 먹겠다고 악을 쓰던 애들이 지금 그런 바보짓을 한 것이다.

되레 그때는 광우병 괴담, 지금은 민영화 괴담 선동에 앞장선 자들의 아이들은 미국에서 쇠고기 잘 먹고 있다. 노동귀족과 강남좌파와 그 자식들은 그렇게 오늘도 “안녕들 하시다.” 바보들 덕분이다.

유시민은 “철도노조를 귀족노조라고 한다면 국민 모두는 천민인 셈”이라고 했다. 그의 혓바닥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말인즉 옳다. 철도노조 같은 귀족노조들은 사실 대다수 서민을 천민 취급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그런 방자함을 보일 수 있는 건 유시민 같은 혹세무민하는 자들 덕분이다.

유시민은 한국의 국민소득이 2만4000달러 선이니 4인 가족 기준 가구별 1년 소득은 9만6000달러 즉 약 1억원이 돼야 하는데, 코레일의 40대 중반 가장이 6300만원 받는 게 어떻게 고액 연봉이냐고 주장했다. 1인당 국민소득을 졸지에 가장의 연봉으로 바꿔 계산하는 게 고의인지 무식인지 따지는 건 지면부족이니, 우선 수치부터 바로 잡자.

2013년 코레일 직원 1인당 평균 인건비는 6880만원이다. 민간영역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는 삼성전자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삼성전자 평균 연봉도 전혀 고액 연봉이 아니라는 얘기가 되겠다. 이 정도는 사소한(?) 문제라 치자. 하지만 평균이란 언제나 최저 최고 모두를 합산해 나눈 것이라는 산수는 잊지 마시라.

신입직원은 2500만원 선이지만 KTX 기관사는 9000만원 선이고, 사장만큼 받는 직원이 400명이 넘는다. 매표전담 직원도 연봉이 7400만원에 이른다. 기관사는 그런대로 좀 전문직이라 그렇다고 해두자.

매표원은 도대체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업무이기에 그런 연봉을 받아야 하나? 게다가 기관사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하루 운행시간은 3시간 이내로 제한한다니! 단협 규정이 그렇단다. 정말 고된가 보다!

유시민이 들먹이는 국민소득 기준을 다시 한 번 보자.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높은 선진 각국 철도 노동자의 평균임금과 비교해보라. 더 기막히다. 일본 5600만원, 미국 4100만원, 프랑스 5900만원, 독일은 4700만원, 영국 5600만원이다. 유시민의 논법대로면 이들 선진국의 철도 노동자들은 모두 천민들이요 코레일 노조는 세계 최고의 귀족집단이 분명하지 않나?

코레일은 빚이 18조원이고 연간 적자가 5000억원이다. 그래도 철도노조원들은 그게 어쨌냐는 투다. 왜 그러냐고? 그들은 그것이 자기 회사의 빚이 아니라 국민들이 부담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귀족답지 않은가?

 

마르크스도 감탄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은 유시민 같은 자들의 의도적 곡해와는 달리 자본가들이 노동운동을 비난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용어가 아니다. 다름 아닌 마르크스가 차티스트 운동의 실패와 관련해 영국 노동계급의 상층부를 비판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엥겔스는 이 개념을 더 발전시켜 1892년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개정판 서문에서 “노동자계급 중에 귀족이 형성되고 있다”며 영국의 거대 노조들을 본격 비판했다. 나중에 레닌은 그 논지를 차용해 ‘제국주의론’과 연관 지어 제국주의 본국의 노동귀족들은 식민지 착취의 공범이라 힐난했다.

물론 그들의 본래 의도는 혁명에 앞장서지 않는 노동계급 상층부의 기회주의를 비난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어떻든 그들의 공통된 결론은 “노동귀족은 노동계급 ‘대중’의 ‘희생’ 위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맞다. 매우 타당한 지적이다! 오늘의 한국 귀족노조들은 정말 그에 잘 어울린다. 귀족노조들은 그 아래 줄줄이 깔린 하청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도처의 서민층의 희생 위에서 “안녕”을 누리고 있다. 민노총은 그런 부류들의 집결체다.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한국의 귀족노조를 무산자라고 하면 마르크스 등이 손사래를 쳐야 한다. 그들은 명백히 ‘가진 자’들이요 특권계급이다. 그런데도 더 많은 특권을 욕심냈다.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자들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가 똬리를 틀었다. 오늘의 민노총은 그렇게 형성됐다.

한국에선 귀족노조와 좌익이 제대로 결합했다. 더욱이 그냥 좌익이 아니라 종북들이 도처에 활개 치기까지 하고 있다. 마르크스 등도 한국의 귀족노조라면 매우 기특하게 여길 게 틀림없다. 물론 북의 최고 존엄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87년 체제의 최대 수혜자

한국의 노동운동은 여러모로 예외적이다. 노조 조직률은 2012년 기준 10.3%로 OECD 평균치 29%의 1/3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막강한 투쟁력을 자랑한다. 민간부문 조직률은 9.2%로 10%로 이하인데 교원노조는 17.3%, 공무원노조는 무려 58.8%다.

좌익들은 낮은 조직률이 노동운동의 열악함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반대다. 민간부문의 대기업 거대 노조에 공공부문의 압도적인 조직률이 힘을 더해주고 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생계형이 아니라 특권형이라는 반증일 뿐이다.

그렇게 귀족노조 중심이면서도 전혀 타협적이지 않다. 특권형답게 뻔뻔하고 이기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전투적이다. 이념적으로도 매우 편향적인데, 그런 위선을 가리는 자기합리화의 측면이 강하다. 남은 물론 자신마저 속이기 위해선 이데올로기만한 게 없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늘 그랬던 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막강 노조들의 탄생과 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이루어졌다. 87년 민주화의 주역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의 산업화의 성공으로 성장한 중산층이었다. ‘넥타이 부대’가 상징하듯 노동자들도 노동자라는 아이덴티티가 아니라 중산층이라는 정체성으로 참여했을 따름이다.

주역은 아니었지만 노동운동은 87년의 진정한 수혜자였다. 그것도 최대 수혜자였다.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약속이 주어지자마자 노동자들의 투쟁이 뒤따랐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때부터 수많은 권리를 확보하며 성장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 87년 이후 노동운동은 언제나 배려를 받았다. 희생당하고 억눌려 있었다는 인식 덕분이었다. 노동운동을 배려해야 마땅히 민주화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런 배려에 힘을 더했다.

 

탈취당한 87년 체제

노동운동의 정치적 대변 역을 자처한 좌익 무리들은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자못 비장함을 연기하며 정치적 근육을 길러갔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거치며 한국의 노동운동은 뗑깡이 체질화돼 갔으며 마침내는 귀족노조 천하가 되고 말았다. 민노당-통진당 등은 바로 그런 뗑깡 귀족노조에 올라탄 정치적 배였다.

그런데 민주화를 간판으로 자랑하던 정치세력들도 그런 상황에 단지 앞다퉈 편승하려고만 했다.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일원이자 보호자이어야 할 자들이 불순한 무리들에게 문을 열어줬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에 물들어 갔다. DJ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YS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친노 세력에 이르면 통진당 등과 같은 명실상부 좌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지경이었다.

귀족노조와 그 안에 똬리를 튼 불순 좌익세력들은 이런 무리들이 제공한 보호막 덕분에 지금까지 정말 호사를 누려왔다. 그들은 87년 체제의 정치적 고혈을 빨아먹으며 성장해왔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생명력을 갉아먹는 동안 그 체제는 전혀 보호받지 못한 채 내팽개쳐져 있었다.

87년이 요구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27년을 거치는 동안 자유는 난장판에, 민주는 떼거리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물론 87년 체제에는 약점이 없지 않았다. 헌법은 물론 정치권 자체도 시작부터 좌익 급진주의에 의해 일정 정도 침투당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유민주주의가 기본원칙이었다. 그런데 그 87년 체제가 아무렇게나 발에 치게 팽개쳐져 있다가 아예 송두리째 탈취 당하고 만 것이다. 지금 빼앗긴 그 자리에는 저열한 포퓰리즘이 난무하고 있다.

여야가 없다. 새누리의 연이은 바보들 덕분에 국회는 ‘선진적으로’ 마비됐고 귀족노조의 기강을 잡을 모처럼의 기회가 날아갔다. 그런 와중에도 국회는 국정원 무력화의 합의를 잊지 않았고 지역 예산 챙겨먹기 난장판에는 여야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종북의 놀이터, 뗑깡의 무대, 안보 파괴, 여기에 정치모리배들이 나랏돈을 훔치는 곳, 이게 지금의 국회다. 건전한 민주주의의 전당? 지금 여의도에 그런 건 없다.

뭐든 그렇지만 특히 민주주의는 제 기능을 하려면 주인을 제대로 만나야 한다. 주인이 주인다운 역할을 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그냥 떼거리의 바보놀이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어떤 점에선 일종의 사치재다. 바보들은 걸치고 있어도 제대로 폼을 내지도 못하는 그런 사치재다. 경제적 수준과 의식 수준이 모두 일정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면 결코 제대로 누릴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격이 돼야 누릴 수 있다

마치 명품, 그 주인의 수준이 높을수록 더 가치를 발하고 지닌 자의 수준이 저열하면 즉각 짝퉁다움을 보여주는 그런 종류의 명품이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귀족노조에 박수를 보내는 바보들이 그 주인이 되면 민주주의는 탐욕의 무리들과 모리배들과 불순한 자들의 장난감이 되고 만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렇다.

87년 체제가 수명을 다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미 빼앗긴데다가 도처의 방향에서 찢어발겨져 그냥 수선해 쓰기에는 너무 누더기라는 느낌이다. 때마침 북한 급변사태에도 대비해야 할 상황마저 다가오고 있다. 중일 갈등도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갈아엎고 새로운 것을 세워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화두를 던져본다. 물론 그 전제는 단순한 제도적 손질 이상이어야 한다. 종북좌익들과 분탕무리들을 먼저 제압하지 못하면 문구가 어찌됐든 헌법도 법률도 모두 휴지조각임을 이미 체험하지 않았나?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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