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제국의 급부상 그리고 프랑스의 보복
독일제국의 급부상 그리고 프랑스의 보복
  • 이춘근 박사
  • 승인 2014.02.24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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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근 박사의 전략이야기 -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연중기획<2>

사라예보의 총성 한 방이 1차 세계대전을 불러 일으킨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화재(大火災)가 오로지 성냥 한 개비 때문에 발발했다고 말할 수 없다. 성냥불이 던져져도 인화물질이 없거나 있다 해도 물에 젖은 것이었다면 화재는 발생하지 않는다.

총성 한 방이 대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대전쟁으로 폭발할 수 있는 요인들이 잠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을 분석할 때 눈에 보이는 원인(precipitant cause)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원인(underlying cause)도 자세히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1914년 당시 유럽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의 세상이 지속되는 것 같았지만 불똥 하나가 세계 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잠재적 요소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우선 1914년 이전 100년간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1815년 나폴레옹이 패퇴한 후 전쟁에서 승리한 유럽 국가들은 앞으로 전쟁 대신 외교와 회의를 통해 국제문제를 해결하자고 약속했다.

비스마르크 (1815~1898)

100년간 평화로웠던 유럽대륙

실제로 이 같은 약속은 지켜졌다. 놀랍게도 전쟁의 대륙 유럽에 100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 1853~1856년의 크리미아 전쟁, 1870~1871년의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이 특기할 만했지만 이 전쟁들은 과거 유럽전쟁들에 비해 조그만 전쟁이었다.

‘외교의 황금시대’ 혹은 Concert of Europe 이라 부를 정도로 1차 세계대전 이전 100년은 예외적으로 평화로운 시대였다. 지오프리 블레이니(Geoffrey Blainey) 교수는 오랜 평화는 ‘전쟁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고 말하는데 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정치가와 일반 시민들은 전쟁을 오히려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한번 신나게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14년 여름 유럽 강대국들은 모두 젊은이들을 소집해서 훈련 시켰고 그들을 전쟁터로 내보냈다. 군대를 전선으로 보내는 유럽 어느 나라의 기차역에서도 슬픈 이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곳은 기쁨과 환호가 왁자지껄한 현장이었다.

전쟁터로 달려가는 젊은 남자들은 신나는 여행을 떠나는 듯 웃고 떠들었고, 이들을 보내는 부모들 심지어 여자친구들까지 즐거운 얼굴이었다. 용감하고 씩씩한 아들들이 혹은 애인들이 적들을 신속하게 무찌르고 훈장 달고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모든 나라는 전쟁을 신속히 승리로 종결 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낙엽이 지기 전 전쟁은 자신이 속한 편의 승리고 끝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전쟁에 참전한 각국 정부는 자국 군인들에게 겨울옷을 지급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은 4번의 겨울을 지내고 문자 그대로 유럽의 청년 한 세대를 거의 고갈 시킬 정도로 혹심한 인명 피해를 야기한 후 5년만에야 겨우 끝났다. 전쟁은 곧 끝난다, 승리는 분명히 우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은 총성 한 방이 수천만의 인명 피해를 낼 수 있는 황당한 인과 관계를 가능케 했다.

전쟁의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요인은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복수심, 적개심이었다. 프러시아 재상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은 철혈(鐵血, 철 과 피 즉 전쟁)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고 특히 프랑스를 격파하지 않는 한 독일의 통일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결국 1871년 프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 독일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제국의 건설

보불전쟁은 전쟁의 규모와 피해 면에서 잔인한 전쟁은 아니었지만 프랑스 사람들을 모욕하고 프랑스 사람들의 마음을 멍들게 했다는 점에서 그 결과가 심상치 않을 전쟁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굴복 시킨 후 프랑스의 왕궁인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그것도 프랑스 왕비가 좋아하던, 거울로 둘러싸인 호화로운 방에서 ‘독일제국’ 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전통적인 유럽의 강대국이었다. 군사적인 면, 특히 육군에서는 프랑스를 당할 나라는 없을 정도로 막강한 국가였다. 프랑스의 경제력 역시 유럽 최강이었고 루이 14세는 막강한 재정으로 유럽 최대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국민개병제를 통해 100만 단위의 군대를 가능하게 했다. 이제 군인은 귀족 혹은 용병 출신이 아니라 애국심으로 무장된 국민(평민)군이었다. 나폴레옹은 애국심을 바탕으로 뭉친 국민군을 지휘, 유럽 패권 장악을 위한 전쟁을 벌였다.

 

독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 프랑스

그렇게 막강했던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프랑스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들은 자국 왕비가 좋아하던 방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한 프러시아에 언젠가는 복수를 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알자스 로렝의 시골학교 불어 교사가 독일군이 그곳을 점령하는 바람에 학교를 떠나며 한 마지막 수업의 슬픈 이야기다. 선생님은 ‘프랑스 만세’라고 칠판에 썼고 그동안 공부를 게을리한 학생은 회한에 슬퍼한다.

프랑스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눈을 밖으로 돌렸다. 이미 영국이 세계 방방곡곡에 식민지를 획득하고 있었고 프랑스도 영국 다음으로 해외의 식민지 획득 경쟁에 빠져 들어갔다.

1871년 이후를 식민지 경쟁의 시대로 부르는 계기다.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획득 경쟁을 벌이며 시간을 기다렸다. 1914년의 위기는 프랑스 사람들이 보기에 드디어 독일에 대해 복수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다가오는 전쟁을 회피할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할 이야기지만 1919년 독일이 패배한 후 프랑스는 독일을 철저하게 몰락시키기로 작정하고 독일에 온갖 배상금, 무장 해제 등 과도한 조치를 취하려 해서 다른 승전국 특히 미국과 갈등을 빚을 정도였다. 프랑스는 독일이 제국 선포식을 거행한 바로 그 방에서, 독일로부터 1차 세계대전 항복 조인을 받아낸다.

크리미아 전쟁

프랑스의 모욕이라는 요인과 더불어 독일제국의 탄생이라는 변수는 총성 한 방이 수천만명의 인명 피해를 야기시킬 수 있게 한 또 다른 구조적 원인이다. 강대국의 출현은 국제 구조의 변화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보다 늦게 등장한 강대국이다. 기존 질서를 흔들어 놔야 자기의 몫을 챙길 수 있는 게 국제정치의 구조다. 그러나 독일의 현명한 재상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몫을 챙기는 대신, 신생 제국 독일을 공고히 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복잡한 동맹 및 협상 체제를 구축, 독일제국이 유럽의 강대국들로부터 위협 받지 않는 안전장치를 구축했다. 비스마르크의 탁월한 외교력 덕분에 독일제국의 성립은 급격한 변동과 전쟁을 초래하지 않은 채 수십년 안정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강대국 독일의 급성장이 초래할 국제정치구조 변동이 개인의 탁월한 능력으로 영원히 억제될 수는 없는 일이다. 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의 급속한 발전은 대서양 건너 미국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세계정치의 변동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요인이었다. 미국과 독일이 언제까지나 국제정치의 변두리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독일도 결국 식민지 쟁탈전에 개입하지만 불행하게도 독일의 몫은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식민지 개척을 위해 필요한 군사력은 해군인데 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해군의 증강은 패권 제국인 영국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영국은 독일의 부상을 방치할 수 없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 선포식

오늘날의 동아시아와 유사한 당시 유럽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1차 세계대전 발발의 근원적 요인들, 구조적 요인들을 오늘날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대입시켜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불길하게 유사하다.

미국의 저명한 평론가 조지 윌(George Will)은 “중국의 발전을 보면 20세기 초반 독일의 발전이 연상된다. 독일의 발전이 야기하던 문제의 해결을 위해 세계는 두 차례의 대전쟁을 치렀다”고 말하면서 중국의 도전에 엄중한 대처가 필요함을 역설한 바 있다.

중국과 일본, 게다가 한국까지 포함된 3국의 상대방에 대한 끈질긴 역사적 적대감은 프랑스 독일의 구원(舊怨)과 다를 바 없다. 중국의 급속한 해군력 증강과 이에 맞서는 미국과 일본은 100년전의 독일과 영국을 방불케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

센카쿠에서 발발할지도 모를 우발적 충돌이 사라예보의 총성과 비유되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경고가 지속되고 있다. 비스마르크와 같은 탁월한 전략가는 보이지 않고 히틀러에 비유되는 사람이 더 많아서 슬프다.

우리나라 언론은 아베를 히틀러에 비유한 북한의 보도를 크게 소개했지만 필리핀 대통령은 시진핑을 히틀러에 비유했고 뉴욕타임스는 이를 크게 보도했다. 자기들은 언제라도 전쟁에 승리한다는 환상에 빠져 있는 북한을 통치하는 젊은이 역시 사라예보의 젊은이를 연상케 한다.

이춘근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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