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어린 촛불시위 역사가 시작되다
광기 어린 촛불시위 역사가 시작되다
  • 김주년 기자
  • 승인 2014.03.1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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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12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날이다. 이로써 노 대통령은 건국 이후 재임 도중에 탄핵당한 첫 번째 대통령이 됐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후보로 선출된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당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 민주당 내 구(舊)주류 인사들 중 다수는 경선 과정에서 이인제 후보와 한화갑 후보를 지지했었다. 이들은 노무현 후보의 선거운동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고 노 후보도 이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없었다.

예상대로 민주당 내 신(新)주류 인사들과 친노의원들은 2003년 중반에 ‘선도 탈당’을 감행했다. 김원기,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장영달 의원 등이었다. 이들은 ‘11월 창당’을 목표로 움직였다. 이미 한총련 합법화 시도, 고영구 국정원장 임명, 송두율 두둔 등으로 ‘좌파 대 우파’, ‘친노 대 반노’의 전선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 노 대통령은 신당 창당을 앞두고 또 한번의 이벤트로 이들을 지원 사격했다.

2003년 10월 10일 노 대통령은 돌연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밝혀 정국을 뒤흔들었다. 각종 극좌 행보와 돌출 언행으로 인해 발생한 지지도 급락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시도였다.

노 대통령의 이 승부수는 성공적이었다. ‘대통령 부재’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유권자들은 노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해 질타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사임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여론조사 결과 노 대통령의 재신임 투표가 실시될 경우 그의 사임에 ‘반대한다’는 의견은 갈수록 높아졌다. 동시에 노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이 퍼지면서 국정수행 지지도도 소폭 상승했다. 국정의 주도권은 노 대통령에게로 일거에 넘어왔다.

열린우리당 창당과 민주당 분열

이는 신당 창당을 추진 중이던 친노세력에겐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당명을 열린우리당으로 정한 신당 세력은 2003년 11월 11일에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당원 등 1만5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중앙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상임의장으로는 김원기 의장이 뽑혔고 이 당시 의석수는 47석이었다.

창당 직후 10%대에 머무르던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반면 한나라당은 검찰의 2002년 대선 자금 수사 결과 ‘차떼기’ 혐의가 발견되면서 맹비난을 받았다. 2004년 4월 총선을 4개월 앞두고 발생한 메가톤급 악재였다.

2003년 12월 민주당은 조순형 의원과 추미애 의원이 전당대회에서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조 의원을 신임 대표로 선출했다. ‘미스터 쓴소리’로 알려진 조순형 의원의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민주당의 지지도는 일부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첫 전당대회 일정이 잡히고 공영방송이 ‘열린우리당 띄우기’에 전력을 기울이자 대세는 열린우리당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연말 연시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의 열기는 점차 높아졌다.

2004년 1월 11일 임시전당대회 결과 정동영 의원이 당대표격인 상임중앙위의장에 선출됐다. 이날 투표는 1인2표 방식으로 실시됐고 정 의원은 전체 유효투표수 1만6676표 가운데 5307표(31.8%)를 얻어 2817표를 얻는 데 그친 신기남 후보를 2490표 차이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거듭된 선거법 위반 행위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의 흥행과 지지도 상승은 친노세력의 신당 창당이 대성공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에 고무된 노무현 대통령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총선 승리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선거법 위반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2003년 12월 19일 노 대통령은 노사모가 주최한 ‘리멤버 1219’ 행사에 참석해 “시민혁명은 계속되고 있다, 다시 한번 나서 달라”며 불법 선거운동을 선동했다. 이어 그는 12월 24일 측근들과의 회동에서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다’는 발언을 했고 이는 언론에 유포됐다. 이 발언으로 인해 그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2003년 12월 30일 ‘공명선거 협조 요청’이라는 공식 제재조치를 받았다.

선관위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의 선거 개입 발언은 더 노골화됐다. 2004년 2월 5일 강원지역 언론인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국참0415 같은 사람들의 정치 참여를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허용하고 장려해줘야 한다”고 발언했다.

또 2004년 2월 18일에는 청와대에서 열린 경인지역 6개 언론사와의 합동회견에서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는 발언으로 열린우리당 지지를 호소했다.

2004년 2월 24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앞으로 4년 제대로 하게 해줄 것인지 못 견뎌 내려오게 할 것인지 국민이 분명하게 해줄 것”이라며 “국민들이 총선에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2004년 3월 3일 중앙선관위는 노 대통령이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을 위반했다는 판정과 경고 조치를 내렸다. 헌정 사상 최초의 사태였다. 이에 민주당은 3월 5일 상임중앙위원회를 열고 ‘3월 7일까지 노 대통령이 반복적이고 상습적인 선거법 위반 행위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경우 탄핵안을 발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탄핵사유에 굴복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2004년 3월 9일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공조해 양당 의원 159명의 서명으로 국회에 탄핵소추안을 제출했다. 탄핵소추안에는 ▷ 노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열린우리당 지지를 유도한 점과 ▷ 대통령 측근 인사들의 부정부패 혐의 ▷ 경제파탄의 책임 등이 명시됐다.

2004년 3월 11일 노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측근 비리에 대해 조목조목 해명한 뒤 “타협을 위해 사과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은 자신의 형 노건평 씨에게 3000만원을 건넨 혐의로 조사를 받던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을 비난했고 기자회견 직후 남 사장은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이는 탄핵 강행에 회의적이던 의원들까지도 ‘탄핵 찬성’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다.

2004년 3월 12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국회 본회의장은 탄핵을 저지하려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에 의해 점거된 상태였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도 탄핵안 처리를 위해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벌이며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대치 중이었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결국 경호권을 발동해 본회의장에서 농성 중이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몰아냈고 탄핵소추안은 표결에 부쳐졌다. 이날 탄핵안 표결에는 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들 외에도 이인제 의원을 비롯한 자민련 의원들과 무소속 정몽준 의원 등 총 195명의 의원들이 참여했다. 표결 결과 찬성 193표 대 반대 2표로 탄핵안은 가결됐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했다. 노사모와 한총련을 비롯한 수백여개 좌파단체들은 2002년 대선 당시 재미를 본 촛불시위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들은 합법적 절차에 따른 국회의 탄핵 가결을 ‘의회쿠테타’라고 몰아붙이며 대규모 집회에 들어갔다. 노무현 정권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공영방송 및 좌파 매체들은 탄핵을 규탄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집중 보도하며 국민 여론을 ‘탄핵 반대’로 몰고 갔다.

대통령을 탄핵한 국회를 규탄하는 여론은 ‘반(反) 한나라당’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이날 저녁 TV뉴스는 탄핵안 가결 이후 국민들의 표심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한 긴급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탄핵 역풍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10%대로 폭락한 반면 동정표를 받은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50%를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선을 한달 남짓 앞둔 한나라당에겐 치명타였다.

탄핵 반대 대규모 촛불시위

여론은 쉽게 반전되지 않았다. 탄핵반대 진영의 촛불시위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주요 언론과 여론조사기관들의 판세분석 결과 한나라당은 2004년 4월 총선에서 60석도 건지지 못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3월 중순부터 우파의 반격이 시작됐다. 위기의식을 느낀 우파 시민단체들은 수차례의 탄핵 찬성 집회를 KBS 본관 앞과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었다. 이는 주눅 들어 있던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 큰 힘이 됐다.

3월 23일 열린 임시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 체제를 출범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 ‘박풍’은 예상보다 더 강했다. 박 전 대표가 가는 곳마다 엄청난 수의 청중들이 운집했다.

치열했던 선거전은 끝나고 4월 15일은 왔다. 투표시간 마감 이후 발표된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 한나라당의 예상 의석수는 90~110석으로 집계됐다. 열린우리당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온 반면 한나라당의 천막당사는 적막감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2002년 12월 대선에서 적중했던 출구조사는 2004년 4월 총선에서는 크게 빗나갔다. 결국 한나라당은 출구조사 예측치보다 높은 121석을 획득, 안정적인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다. 탄핵 역풍이라는 메가톤급 악재 속에서 일궈낸 값진 결과였다.

그러나 이것이 ‘총선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나라당과 손잡고 탄핵안을 가결했던 민주당은 탄핵 역풍으로 인해 수도권에서 전멸했고 호남에서도 전남에서만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탄핵 역풍에 힘입어 수도권과 충청권 및 호남에서 압승, 과반 의석인 151석을 얻었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탄핵소추안을 기각시켰다. 헌재는 노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발언 및 재신임 발언이 ‘헌법 위반’이라는 것까지는 인정했으나 ‘대통령의 직무를 중단시킬 사유는 되지 못한다’는 논리로 탄핵안을 기각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직무에 복귀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5월 4일 주한 외교단 리셉션에서 “부활은 예수님만 하시는건데 한국 대통령도 죽었다 살아나는 부활의 모습을 보여줬다”며 자신의 탄핵 과정을 예수님의 부활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탄핵 사유였던 ‘선거법 위반’ 행위에 대해서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김주년 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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