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패권에 도전한 독일
영국의 패권에 도전한 독일
  • 이춘근 박사
  • 승인 2014.03.2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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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근 박사의 전략이야기 -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연중기획<3>
 

이 세상에 발발했던 수많은 전쟁이 있지만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에 대해 명명백백한 전쟁은 그렇게 많지 않다. 누가 진짜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전쟁이 오히려 더 많을 정도다. 그래서 아직도 한국전쟁은 대한민국과 미국이 북침해서 발발한 것이라고 우기는 자들과, 침략은 ‘정의’ 될 수 없다고 강변하는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과정 역시 누가 침략자인가를 분명하게 판단하기 애매한 부분들이 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한 지 5일째 되는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에 맞서기 위해 7월 25일 군 동원령을 내렸다. 세르비아를 지원하던 러시아는 7월 26일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러시아가 부분 동원령을 내리는 날 오스트리아도 동원령을 발령했다.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세르비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빌헬름 2세를 다룬 프랑스 엽서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

러시아는 7월 30일 총동원령을 하달했고 그 다음날인 7월 31일 독일은 전시상태를 선포하고 러시아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러시아가 이를 무시하자 독일은 8월 1일 총동원령을 내림과 동시에 러시아에 선전포고 했다. 강대국 두 나라가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독일과 러시아가 전쟁 상태에 들어가자 프랑스도 곧바로 동원령을 선포했다. 슐리펜 플랜이라는 경직된 군사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은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벨기에에 독일군 통과를 요청하는 최후 통첩을 보낸다. 벨기에가 이를 거부하자 독일은 다음 날인 8월 2일 곧바로 벨기에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8월 4일 독일군이 벨기에를 향해 진격하자 벨기에를 보호해야 할 조약상의 의무를 진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이 훼손당했다’는 이유로 즉각 전쟁에 개입했다. 영국이 정한 마감시간인 8월 4일 밤 11시까지 독일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자 영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한 지 3일만에 영국, 프랑스 마저 전쟁에 빠져 들었다. 세계 대전은 이렇게 발발한 것이다.

당시 군대의 조직, 구조 및 기능을 고려할 때 총동원령은 사실상 전쟁을 하겠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었다. 총동원령은 코끼리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1914년 7월 하순 며칠간의 국제정치만 보면 도무지 누가 침략국이고 누가 침략을 당한 나라인지를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누구도 다가오는 전쟁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국의 패권에 대한 독일의 도전

전쟁 직전의 모호한 외교사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대체로 독일을 대전을 도발한 원흉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이 독일 책임론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1961년 간행된 프리츠 피셔 교수의 ‘Griff nach der Weltmacht(세계재패의 야욕)’(영문판 Germany’s Aim in the First World War)는 1차 세계대전 발발의 책임이 독일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독일은 1870년 프랑스를 격파하고 독일제국을 선포한 후 비스마르크라는 비상한 인물의 탁월한 외교정책으로 유럽의 균형과 평화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당시 세계 패권국이었던 영국과 독일은 1888년까지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독일 황태자 프리드리히 3세의 부인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였다는 점도 영독 우호관계의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1888년 3월 황위에 오르자마자 3개월 만에 사망했고 같은 해 비스마르크도 재상직에서 은퇴했다. 곧바로 빌헬름 2세가 즉위했고 영국과 독일 관계는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을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했으며 그의 야심은 해외시장과 식민지를 둘러싼 영국과 독일의 경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독일은 영국과 경쟁하기 위해 막강한 해군력을 필요로 했다.

1890년 미국에서 간행된 알프레드 T. 마한 제독의 ‘해양세력론’(The Influence of Seapower upon History)을 읽고 감동 받은 빌헬름 2세는 열렬한 해군주의자가 됐다. 독일은 1898년과 1900년 해군법을 제정했는데 해군 장관 티르피츠(Alfred Von Tripitz)가 주도하고 황제가 적극 지지한 것으로서 향후 20년 내에 38척의 전함을 포함하는 대양 함대를 건설한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독일은 영국을 가장 위험한 세력이라고 간주하고 북해에서 영국 해군과 충분히 맞설 수 있으며 동시에 유사시 영국에 큰 피해를 입혀 영국의 ‘2국 표준주의’ 전략을 무너뜨릴 수 있는 충분한 해군력을 건설하고자 했다. 2국 표준주의란 1889년 영국의 해군 방위법에 규정된 것으로서 영국 해군은 항시 2, 3위 국가의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 더 강한 해군 전력을 확보하겠다는 내용이다.

영국은 미국, 일본 등의 도전 때문에 상황이 어렵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단독적 힘으로 세계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소위 ‘영광스러운 고립’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마저도 영국 해군의 우위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빌헬름 2세

세계 균형을 포기하고 유럽에 집중하는 영국

독일은 1900년부터 1904년 사이에 14척의 전함을 건조하는 막강한 산업 능력을 과시했다. 특히 이 무렵 발발한 보어전쟁에서 독일이 보어를 편들자 영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정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됐다.

1901년 영국은 역시 마한의 해군전략론에 따라 해군력을 급속히 증강 시키던 미국과의 해군력 경쟁을 포기했다. 1902년에는 일본과 영일동맹을 체결, 극동에서의 러시아 진출에 대한 견제 역할을 일본에 맡기기로 했다.

영국이 이처럼 결정한 것은 우선 미국 해군은 영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과, 세계의 다른 지역, 즉 태평양에 대한 방어는 동맹국 일본에 맡기고 오직 유럽의 해역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1904-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하자 영국은 인도에 가해지던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었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1912년 12월 8일 전쟁위원회를 소집, 18개월 이내에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전쟁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독일의 전쟁 야망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특히 영국, 프랑스와는 달리 독재국가인 독일의 군부는 민간인들의 통제 밖에 있는 존재였다. 독일군 고위 장교들은 황제의 직접 명령을 따랐고 독일 국회나 민간인 장관들은 군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반복되는 역사

1차 세계대전 도발국 독일의 존재는 막강한 강대국 중에 독재국가가 포함돼 있는 경우 특히 그 나라가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인 경우 그 국제정치체제는 결정적으로 불안해진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탁월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식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는 말 중의 하나가 ‘오늘의 국제정치는 100년전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는 말이다. 마침 지난 2월 1일 독일의 뮌헨에서 열린 세계안보회의에서 키신저 박사는 현 아시아 상황을 “20세기 초반 유럽의 상황과 비슷하다.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 국면이 고조되면서 ‘전쟁이라는 유령’이 아시아를 배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21세기를 아시아의 세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20세기는 누가 보더라도 유럽의 세기로 시작됐다. 유럽의 세기가 시작된 후 14년만에 대전쟁이 발발했는데 21세기가 시작되고 14년째 되는 오늘 아시아의 분위기는 대단히 심상치 않다. 영국의 입장이 된 나라는 미국이며 독일의 처지가 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독일이 유럽 해역에서 영국 해군을 몰아내려는 바와 똑같이 중국은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해군력을 몰아내고 싶어 한다. 중국의 해군력 증강은 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해군 장관 티르피츠의 해군력 증강과 맞먹는다. 100년 전 독일의 경우처럼 중국 역시 독재국가로서 민간인이 군부를 확실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100년 전 일본의 역할과 현재 일본의 역할에도 유사점이 있다. 일본은 영국을 적극 지지하는 나라가 돼 1차 세계대전 전승국의 일원이 됐고 큰 이익을 챙겼던 나라다. 지금 일본은 미국을 적극 지지하는 나라가 돼 100년만에 다시 야기된 ‘세기적 패권 대결’에 중요한 조연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일본의 역할은 ‘변두리’에 한정돼 극동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극동에서의 독일 이권을 견제하는 것이었지만 현재 일본은 미국과 함께 직접적인 도전세력 중국에 직접 맞서고 있다. 현재의 일본은 미중 패권 경쟁의 주공(主攻) 방향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점에서 100년 전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은 미중 패권전쟁의 결과로부터 오는 이득을 다 챙기든지 혹은 손해를 적극적으로 감수하겠다는 과감한 전략을 택한 것이다. 그것이 아베의 우경화 정책이다.

100년 전과 지금을 완전히 다르게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당시 영국 해군은 2국 표준주의를 유지하기에도 벅찼지만 현재 세계 1위인 미국 해군은 2위부터 14위까지 해군을 다 합친 것만큼 강하다는 점, 게다가 미국 다음 13개 국가 중 11개국 해군이 미국에 우호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누가 이길까? 그리고 우리는 누구 편에 서야 할까? 21세기 동아시아에서 상당한 능력과 비중을 차지하게 된 오늘,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 구상하고 있는 전략적 선택이 무엇인지 대단히 궁금하다.

이춘근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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