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위구르人에 대한 기억
어느 위구르人에 대한 기억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4.03.2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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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오셨죠?”
카자흐스탄 알마아티 공항에서 접선한 가이드는 내게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는 위구르족 여성이었다. 물론 나는 위구르 반군을 취재하러 그곳에 갔다.

1997년 북경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버스폭발 테러의 주인공은 바로 위구르 반군이었고 그들은 지휘부를 카자흐스탄에 뒀다. 나는 KBS <세계는 지금> PD로 그해 여름 이들을 취재할 기회를 얻었다.
위구르 반군의 정식 명칭은 ‘동투르키스탄 해방전선’이었다. 우리로 치자면 상해 임시정부 같다고 할까. 본부는 뉴욕에 있었지만 해방군은 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우리를 속였다”

“인터뷰는 한국 언론이 처음이에요. 독일 자이퉁, 영국 BBC 모두 거절됐는데 어떻게 한국 언론이 OK됐는지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특종이었다. 하지만 왜 동투르키스탄 해방전선의 지도자가 다른 나라들은 제외하고 한국의 KBS 취재 요청을 받아들였는지는 나도 알 길이 없었다.

알마아티 공항에서 준비된 차량으로 외곽도로를 타자 하얀 만년설을 머리에 얹은 거대한 산맥이 계속 이어졌다. 뜨거운 열기에 일렁이는 만년설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렵다.
“한텡그리에요.”

위구르 가이드 여성은 중국의 천산(天山)을 그렇게 불렀다. Han Tengri. 우리 말로는 ‘천공의 군주’라는 뜻이다. 그런 표현이 어울려 보였다. 워낙 거대하고 높은 산이라 아무리 차량이 멀리 벗어나려 해도 그 웅장한 산맥과 봉우리들은 끊임없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4시간 넘게 달린 차량은 해가 진 후에 한 마을에 도착했고 거기서 가이드는 다른 위구르 청년들의 안내로 취재팀을 인도했다. 일부러 골목골목을 빙빙 돌고 건물 안에 들어갈 때는 바닥을 보도록 요구받았다. 그렇게 만난 위구르 반군 지도자는 취재팀을 정중하게 맞았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그는 책상 위에 아주 낡은 지도를 한 장 폈다. 알 수 없는 글자들과 붉은 선들로 이리 저리 경계가 표시된 지도였다.

반군 지도자가 펼쳐 보인 지도는 신장지역의 고지도였다. 신장지역이 중국의 통치에 들어간 것은 청나라대였다. 지도자는 그 청나라가 “중화인민공화국이냐?”고 내게 물었다. 중국 공산당이 청을 타도했다면 당연히 신장 위구르지역도 독립됐어야 한다는 것이 지도자의 주장이었다.

“마오쩌둥이 우리에게 약속을 했었다. 중소분쟁에서 중공을 도와 전쟁에 참가해 준다면 위구르를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었고 수많은 청년들이 전장에서 죽거나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우리를 속였다. 우리의 독립투쟁은 정당하다.”

위구르 반군 지도자는 취재진의 카메라 앞에서 중국어로 일장 연설을 했다. “우리는 독립을 원한다. 중국은 자유를 억압하는 파시스트 국가다. 위구르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마지막 한 명까지 투쟁할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물었다.
“ 왜 많은 국가들 가운데 한국의 언론과만 인터뷰에 응했나?”
그는 한국인들이 과거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역사를 언급했다. “한국인들이라면 우리 위구르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위구르인과 한국인은 중국인들보다 더 먼저 그리고 우호적인 교류를 갖고 살아오지 않았나.”

 

테러에 칼을 사용한 이유

이 위구르 반군 지도자와 나눈 이야기를 모두 밝히기는 어렵다. 그것은 국제정치를 넘어서는 이야기였고 한국과 위구르의 아득한 교류사 저 너머 좀 더 신비로운 문화적 연대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 대해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었고 양국의 교류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떤 야심찬 계획이 있었는데 동아시아 끝의 한국과 서유럽이 시작되는 터키를 아우르는 문화적, 정신적 공동체였다. 그는 그러한 문화투쟁이 중국의 야욕을 잠재우는 본질적 투쟁이라고 믿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최근 중국에서 벌어진 위구르인들의 테러를 보며 다시 그의 말이 떠올랐다.
“중국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한국인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줘야 한다. 한국이 중국이 아닌 것과 같이 동투르키스탄은 중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국이 우리 위구르인들에게 관심과 지원을 보여주기를 우리는 바란다.”

그때 위구르 지도자는 자신의 조부 때부터 물려받았다는 장검을 탁자위에 올려 놓았다. 위구르인들의 칼은 그들의 정신을 의미한다. 신라 고분에서 발굴된 터키석이 박힌 환두대도는 어쩌면 투르크라 불리는 위구르인들과 한국인들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는 아닐까.

위구르인들은 테러에서 그런 자신들의 정신을 ‘칼’이라는 무기로 사용했다. 하지만 위구르인들의 그런 테러가 그들의 독립을 앞당겨 줄 것 같지는 않다. 그 보다는 반군 지도자의 말처럼 유라시아 문화 공동체의 기억을 회복하는 것이 더 유효할지도 모른다.
이미 신장의 젊은 위구르인들은 중국화돼 간 지 오래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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