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에 처한 한국 大學들
전환기에 처한 한국 大學들
  • 미래한국
  • 승인 2014.04.01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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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각 편집고문·고려대 명예교수
 

한국대학들이 처한 전환기적 중요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한국 대학들의 변화를 촉구하고자 한다. 먼저 대학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원래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서구적 대학 개념은 학문연마와 증진을 통해 지식을 발전시키고 축적해 세대 간 전수하는 가장 지성적인 기관(공간적 조직)으로 이해돼 왔다.

반면 정신을 중시하는 동양적 대학 개념은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도리(道理)를 깊이 연구하고 덕(德)으로 들어가는 수득(修得)과정으로 보는 추상적 개념에 치중해 왔다. 그러나 후자도 정신과 도리의 연마와 전수를 위한 장소로서의 기관(서당이나 학교시설)이 필요하고 동시에 지식의 연마전수 당사자로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 역시 장소적 공간을 통해 이뤄져 왔다. 그래서 대학(교)은 공간적 양적 측면과 정신적 질적 측면에서 논의돼야 할 것이다.

전후(戰後) 사회적으로 교육과 학력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고등교육기관의 양적 팽창은 정부의 공사학(公私學)에 대한 강력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수와 학생수에 있어서 인구증가 속도보다 월등히 빠르게 늘어났다.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인가 숫자가 급증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각 대학의 수용학생수도 평균적으로 지난 60여년 사이에 200퍼센트 이상 성장했다. 대학의 이 같은 양적 성장은 눈감고 아옹하는 교육행정과 학생수를 먹잇감으로 하는 대학당국 간의 결탁부정합작품이다.

1960~1970년대에 학생 정원으로 규제받던 대학 당국들이 등록금 수입을 위해 각 학과별로 정원 외의 청강생을 배 이상 모집하는 것이 관행으로 돼 있었고 교육 당국과의 물밑거래를 통해 대학졸업장을 발급해 줬다.

대학의 양적 성장과 학력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상

대학을 마친 졸업생들은 문교부에서 인정한 ‘학위증’과 대학 총(학)장이 발급한 ‘졸업장’이라는 두 종류로 구분됐지만 실상 졸업생은 그 누구도 그 구분을 모른 채 대학문을 나왔다.

이런 혼란기에 대학교육의 질적 내용은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된 정치 싸움판 속에서 대학생들이 기성세대와 정치사회에 대해 분노하며 거리 데모를 계속하면서 강의는 매학기 몇 시간 이상 진행될 수 없었던 것이 실제였다. 학생들은 학문연마보다 정치적으로 숙성돼 학문지식과 인격 수득(修得)이 되지 못한 사회 구성원이 됐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사람들의 인격자질이 낮은 품격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개인들뿐만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우리 국민이 다른 선진문화국민의 정신과 품격에 견줄 만큼 높은 수준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공직사회나 교육, 종교계 어디에서나 맘몬이데올로기, 출세와 명예이데올로기, 학력이데올로기, 자기과시이데올로기의 숭배가 넘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돈을 좀 벌거나 출세를 좀 한 자(者)치고 누구나 박사학위를 갖기 위해 대학과 지인 교수들을 매수 타락시키는 데 일조하지 않은 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필, 표절로 학위를 취득한 죄는 따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비리에 숙주(宿主) 된 사회와 교육계이다.

잘 나간다고 소문난 종교지도자들이 부정학위취득이나 불의한 행위를 저질러도 법(法)은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더욱이 일반 대학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 관련 대학들의 서비스 수준과 그 실태는 물을 것도 없이 부끄러운 형편이다.

대학교육 수요자(학생, 학위추구자)의 수준과 마찬가지로, 교육 공급자(학원경영당국자와 교수, 교직원)의 수준도 최근에 많이 향상되기는 했지만 아직 선진국 수준에 비하면 어림도 없이 후진적이다.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교수 중 학문 연구와 학생교육보다 정치나 관계(官界)로의 진출을 더 바라며 뛰어다니는 학자들의 비율이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드물다.

허울뿐인 학위보다는 진정한 학자들이 존중받아야

한국 대학의 근래 평균 교수보수(급여와 연구비) 수준은 세계적으로 상위수준이다. 학문과 연구성과에 비례하는 한국의 평균 교수수입은 일본이나 미국 보다 낮지 않다. 생산성보다 높은 보수지급을 위해서는 등록금을 내야 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배우고 얻는 것보다 훨씬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파레토(Pareto)의 일반 균형, 즉 ‘그 누구를 더 나쁜 상황으로 내몰지 않고는 다른 어떤 사람을 더 좋게 해줄 수 없는 상황’이 이 나라의 교육공급자(교수봉급)와 교육수요자(학생등록금)간에 오래 전부터 정착돼 왔다. 양심이 있는 학자들 중에는 더 높은 생산성으로 학생들에게 보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지만 학자적 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교육자들 보다 개인 영달을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교육자가 더 증가하고 있는 세태이다.

그동안 저출산율로 학생수가 앞으로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고 사회 진출의 기회가 학위나 학력보다는 기능과 기술, 그리고 적재적소에 부합되는 실력 위주로 열리게 되면 대학의 숫자는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창조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지식산업이 정상궤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학의 양적 구조조정을 통해 질적인 도약을 위한 정부당국의 집중적이고 선별적인 지원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 승려, 기업주, 공무원, 농민들처럼 특별히 전문분야의 높은 학문을 겸비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들이 학위이데올로기에 젖어 허울뿐인 Ph.Ds(Pile-high-deep shit: 높고 깊게 쌓은 똥)를 얻기 위해 재주부리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형설의 공을 쌓아 박사학위를 받아 연구실 불을 밝히고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는 진정한 학자들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으며 자부심을 가지고 사회와 미래 세대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의각 편집고문·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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