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그 영욕의 길
한화, 그 영욕의 길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4.04.04 09:3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37년 경기상업학교에 입학한 한 소년은 어느날 한국학생이 일본학생에게 얻어맞는 것을 봤다.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해 일본인 학생을 구타했고 그 사유로 퇴학을 당했다. 청년이 된 그는 1941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상과 2년을 중퇴하고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입사한다.

1952년 서른 살의 젊은 사업가가 된 청년은 창업자가 돼 조선화약공판 입찰에 뛰어들어 인천 화약공장을 낙찰 받았다. 그는 폐허가 되다시피한 인천공장 입구에 자신의 회사를 세웠다. 바로 오늘 한화그룹의 모태가 된 한국화약이고 창업자는 바로 한화 김승연 회장의 부친 현암 김종희 회장이다.

김종희 회장은 한국에서 최초로 1957년 다이너마이트 원료로 쓰이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생산했다. 이로써 다이너마이트 국산화 시대를 열었다. 이후 한화의 인천공장은 경부고속도로 등 기간산업에 필요한 화약을 공급하며 2006년 가동을 중단할 때까지 폭약 124만 톤, 뇌관 11억 개, 도화선 7억7000만 미터를 생산했다.

1965년 한국화성공업을 설립하고 1968년 진해에 연산 1만5000톤 규모의 PVC 공장 및 PVC 가공 공장을 세웠다. PVC 제품은 국내 피혁, 철강재, 건축재료로 공급됐다. 특히 비닐하우스 공급으로 농업 증산에 기여했다. 1969년 경인에너지주식회사를 설립하며 사세를 넓힌 김 회장은 1976년 6월 ‘빙그레’란 상표로 아이스크림을 출시해 인기를 얻기도 했다.

한국화약은 충남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으로 성장해 갔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한국화약 김종희 회장의 지원을 받았고 그 대표적인 정치적 동업자는 바로 JP였다. 김종희 회장은 애국적 기업인이었다.

가업을 이어받은 김승연 회장

1981년 김종회 회장이 별세하자 아들인 김승연 회장이 선대를 이어 한화의 총수로 취임했다. 취임 1년 만에 그는 한양화학(현 한화케미칼)과 한국다우케미칼을 인수, 석유화학 사업에 진출하고 이어 1983년 경인에너지 내국화를 단행하면서 매출을 2배 이상 늘려 재계로부터 ‘제2의 창업’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5년 정아그룹(현 한화호텔&리조트), 1986년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을 인수하면서 3차산업에 진출했다. 1986년에는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이글스)를 창단했고 1990년 경향신문사를 인수했다.

1990년 이후 김승연 회장은 한화의 해외 진출을 추진하면서 1993년 아테네은행 인수, 1996년 헝가리 엥도수에즈 부다페스트은행(현 헝가리 한화은행)을 인수했으나 90년대 중반의 IMF 외환위기 체제 하 기업 구조조정 시기를 맞아 혹독한 구조조정 시기를 거친다.

이 시기 한화 바스프우레탄, 한화에너지, 한화자동차부품 등의 회사를 매각했으며 유화사업 맞교환 등의 창조적 구조조정으로 국내는 물론 산케이신문, 로이터통신 등에서 ‘구조조정의 마술사’란 별명을 얻었다.

무엇보다 김승연 회장은 2002년 대한생명 인수로 재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의 이종구 한나라당 의원은 2004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와 예금보험공사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한화그룹의 대한생명(이하 대생) 인수에 대한 특혜 의혹을 도마 위에 올렸다. 이 의원은 국정감사 정책자료집을 통해 “정부가 지난 2002년 대한생명을 무자격자에게 거의 공짜로 매각해 사실상 특혜를 줬다”고 주장해 관계자들의 진땀을 뺐다.

이 의원은 “2001년 9월 대생에 대한 1조5000억원의 공적자금 출자로 인해 한화컨소시엄의 대생 인수가격은 1조6150억원이 아닌 1150억원에 불과한 셈”이라며 “대생 매각 직전 공적자금을 투입한 것은 대생 인수자에게 엄청난 특혜를 부여한 것”이라고 정부를 몰아붙였다.

이종구 의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대생의 매각심사소위는 소위위원 4명중 3명이 한화그룹의 부채비율이 200%를 넘는 등 보험사 인수자격 요건이 불충분하고 매각가격이 낮다는 이유로 한화 인수에 반대했으나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사무국이 반대 의견을 묵살했다는 것. 하지만 이 문제는 대법원에서 ‘하자 없음’으로 종결됐다. 이후 한화의 대한생명은 날개를 단 듯 사세를 확장했다.

2010년 한국거래소에 상장됐으며 2010년 6월 푸르덴셜투자증권 및 푸르덴셜자산운용을 인수한다. 이후 중국 솔라펀파워 홀딩스 지분을 인수하며 한화솔라원으로 명칭을 변경하며 태양광 산업에 진출했다. 2011년 중국지역에 사업 확장을 위해 한화차이나를 설립하는 등 김승연 회장은 30년 동안 회장으로 재직하며 한화그룹을 매출 27배, 총자산 115배, 당기순이익 223배 성장시켰다.

김승연 회장은 경영자 외에 사회독지가로서도 독특한 일을 했다. 1997년 국가 기밀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미 펜실베이니아주 앨런우드 연방교도소에 수감됐던 로버트 김에게 김승연은 수년간 생활비를 지원했다. 이러한 사실은 로버트 김이 2005년 10월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자 한화그룹은 천안함 승조원 유가족을 한화그룹 계열사에 우선 채용하겠다고 밝히자 46명의 천안함 희생자 중 36명의 유족이 한화에 취업을 희망했으며 이중 2010년에 취업을 희망한 가족 5명 전원이, 2012년 기준으로 7명이 (주)한화와 한화테크엠에 근무하고 있다.

김 회장의 두 얼굴

하지만 김승연 회장의 도덕성에 대한 비난과 논란도 많았다. 1992년 미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인근의 벤투리 카운티 히든벨리 지역에서 영화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의 별장을 470만달러에 사들였으며 이에 앞서 1979년 사우디 아리비아의 건설중개업자로부터 수수료 650만달러를 홍콩의 은행에 예치시킨 혐의로 구속, 1994년 외국환관리법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추징금 47억300여만원을 선고 받았다.

아울러 창업주인 부친 김종희 회장이 1981년 타계하면서 유언장을 남기지 않자 당시 29세 나이로 김 회장이 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아 동생인 김호연 빙그레 회장과 재산 분할 관련 31차례 재판을 진행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김승연 회장의 둘째 아들이 술집 종업원과 몸싸움을 해 눈에 부상을 입자 김 회장은 경호원 17명을 대동하고 자신의 아들과 몸싸움을 벌인 술집 종업원을 청계산으로 끌고가 폭행을 가해 처벌을 받았다. 배임죄로 2014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사회봉사 300시간 선고를 받았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노인 2014-05-25 03:04:52
'1982년 김승연 회장이, 취임 1년 만에 한양화학(현 한화케미칼)을 인수'라는 부분은 제가 기억하기로는 1974년에 이미 산업은행으로부터 불하(?)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잘 아시는 분으로부터 전해들은 기억이 나서 몇자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