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왕 에디슨, 그는 기업가였다
발명왕 에디슨, 그는 기업가였다
  • 미래한국
  • 승인 2014.04.1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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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기 상업화 120주년
 

2013년 극장에서의 1인당 영화 관람 편수 세계 1위는 바로 한국이다. 미국이 줄곧 1위였는데 한국이 4.12편으로 미국의 3.88편을 앞질렀다. 그런 만큼 한국의 영화시장은 국제적으로 인구 규모 이상의 대접을 받는다. 이제 웬만하면‘동시 개봉’이다. 할리우드의 주연배우들이 한국을 직접 찾아 인사를 하는 것도 익숙한 광경이됐다. 이쯤 되니 흥행을 위해서라도 애써 영화의 무대로 삼을 만하다. 촬영 여건도 좋다. 한국의 발전상은 현대물이나 SF 오락물의 무대로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러면서도 비용은 미국 현지보다 훨씬 적게 든다. 매우 협조적이기까지 하다. 4월 초 현재 서울에서 진행 중인‘어벤져스 2(The Avengers 2)’촬영이 그런 경우다. 교통체증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거의 대다수는 환영 분위기다. 전세계를 상대로 한 할리우드 영화의 위력을 아는 것이다.

가히 영화의 시대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지만 인류가 늘 영화와 함께 살아온 건 아니다. 연극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있었지만 영화는 오롯이 현대의 것이다. 극본, 배우, 관객 등 공통점이 있는 만큼 영화도 연극과 비슷한 어떤 것이라 여기기 쉽다.‘( 연극영화과’도있지않나!) 그러나영화는 연극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영화는 과학기술 문명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무엇 보다도 철저히 현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영화는 수익성이 전제 조건이다. 그렇지않으면 아예 극장에 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처음 탄생할 때부터 그런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등장했다.

영화의 탄생, 뤼미에르 혹은 에디슨?

영화의 탄생은 통상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한 것이라 일컫는 경우가 많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한 살 롱 에 서 시 네 마 토 그 래 프(Cinematographe)라는 영사기로 마차가 달리는 거리의 장면을 보여준 게 최초라 한다. 시네마토그래프는 꽤 훌륭한 장비였으며 뤼미에르 형제는 분명 영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영화의 최초 발명자는 아니었다. 모든 기술적 발전이 대체로 다 그렇듯 시네마토그래프에도 원조가 있었다. 바로 미국의 발명 왕 에 디 슨 의 키 네 토 그 래 프(Kinetograph)와 키 네 토 스 코 프(Kinetoscope)였다.

축음기를 발명한 에디슨은‘눈을 위한축음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 연구를 젊은연구원에 맡겼다. 그렇게해서 1888년 촬영기 키네토그래프를 완성하고 1889년에는 키네토스코프라는 영사기도 만들어 1891년 특허를 취득했다. 물론 키네토스코프는 스크린에 영상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재생되는 영상을 눈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영사기와는 달랐다. 훗날의현대적영사기에더가까운것은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였다. 그러나 시네마토그래프는 에디슨의 발명품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영상의 촬영과 재생이라는 영화의 기본 개념은 에디슨이발명한것이었다.

특히 상업적 측면에선 영화의 탄생은 확실히 에디슨 쪽이 먼저였다.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를 일반에 공개하기 전 그것을 통해 보여줄 활동 사진의 제작을 위해 블랙 마리아(Black Maria)라는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새로운 발명품의 상업적 활용을 위해 콘텐츠를 제작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촬영기 키네토그래프가 야외촬영을 위한 기동성이 없어 고정된 스튜디오가 필요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에디슨은 기술적 개량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그것을 상업적으로 활용할 사업 구상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에디슨의 진면목이었다.

에디슨(1847~1931)

영화산업을 탄생시킨 사업가 에디슨

일반적 선입견과는 달리 에디슨은 단순히 발명 자체에 심취해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무엇보다 사업가였다. 1894년 4월 14일 에디슨은 드디어 키네토스코프를일반에 공개했다. 그냥 소개하는 게 아니었다. 블랙마리아에서 제작한‘영화’를 유료로 보여주는 상업적 키네토스코프 전문점을 뉴욕에 연 것이다. 하나만이 아니었다. 뉴욕의 키네토스코프 전문점은 그 1호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미국의 주요 대도시에 급속하게 전문점이 만들어졌다.

키네토스코프 팔러(Kinetoscope Parlor)라는 영화 관람 상점 체인 시스템을 구축한것이다. 에디슨은 그 체인점들에 자신의 ‘장비’를 판매했다. 이것이 영화 관련 장비의 상업적 판매의 최초의 사례였다. 한동안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에디슨의 영화 사업은 1896년 무렵 위기를 맞았다. 초기의 선풍이 가라앉고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가 붐을 일으키면서였다. 그러자 에디슨은 새로운 방안을 찾았다. 1896년 초 미국에서도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와 유사한 장비가 개발됐다. 키네토그래프로 촬영한 영상을 스크린에 영사할 수 있는 판타스코프(Phantascope)라는 장비였다. 그런데 개발자들은 그 장비의 특허출원이나 사업의 능력이 없었다.

소식을 들은 에디슨은 즉각 그것을 사들여 특허권을 확보했다. 발명왕답지 않다고 하겠지만 그는 사업가였다. 에디슨은 그렇게 확보한 발명품에 바이타스코프(Vitascope)라는 이름을 붙여 일반에 공개하고 다시 영화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반면 뤼미에르 쪽은 좀 달랐다. 그들도 영화의 사업성을 도외시한 건 물론 아니었다.

상업적 감각도 있었고 마케팅 능력도 상당했다. 그러나 뤼미에르 형제는 과학적이고 학구적인 경향이 좀 더 강했다. 그들이 더 열의를 쏟은 것은 사업보다는 영화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쪽이었다. 더욱이 나중에는 영화 자체에서도 손을 떼고 다른 여러 가지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동생인 루이는 컬러 사진 연구에 몰두해 그와 관련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한편 형인 오귀스트는 의학공부에 매진해 의학자로 일생을 마쳤다. 에디슨은 사업가였지만 뤼미에르 형제는 아무래도 연구자였다.

키네토스코프

미국의 힘, 자본주의의 힘

프랑스에서는 영화 발명의 주인공을 뤼미에르라 하고 미국에서는 에디슨이라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쨌든 상업적 측면에서의 영화, 즉 영화산업의 창시자는 에디슨이다.

에디슨의 영화 사업은 아주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계속됐다. <네로와 로마 방화>(1909) <레미제라블>(1909) <프랑켄슈타인>(1910)등 스토리를 가진 본격 서사물을 만들기도 했다. 한편‘에디슨 영화사’는 미국 영화 초창기의 메이저사의 하나로 군림하며 영화특허회사 MPPC(Motion Picture Patent Company)를 조직해 독점을 시도하기도했다. 사업가다웠던 셈이다.

뤼미에르와 에디슨의 차이는 프랑스와 미국의 차이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영화가 새로운 심미적 표현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미국에선 영화는 처음부터 상업적 오락물이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선 명실 공히 하나의 산업이 됐다.

1910년 중후반부터 1920년 사이 미국 전역에는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이미 2만개나 존재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영화 발흥 초창기에도 세계영화산업은 미국이 지배했다. 유럽에선 호사가나 비평가를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표현 기법을 시험했지만 미국에선 대중이 원하는 재미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유럽에선 작품을 만들려 했지만 미국에선 팔릴 제품 즉 상품을 만들었다. 미국은 언제나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그것이 미국의 경쟁력이었다. 미국의 힘은 결국 자본주의의 힘이었다.

사실 에디슨 자체가 바로 미국의 그런 특성의 집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발명을 쏟아내던 시절은 미국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 남북전쟁 이후 급속하게 산업발전이 이뤄지고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던 시절이었다. 에디슨은 시대정신의 총아였다. 성실, 경쟁, 낙관주의 그리고 어떤 점에선 거리낌없는 탐욕에 이르기까지 에디슨은 성장의 질주를 거듭하던 당시 미국의 정신적 면모를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에디슨의 발명은 그런 탐욕까지도 건강하게 받아내 주는 풍토가 있었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에디슨은 호승심과 과시욕도 분명 대단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현실적인 관심은 언제나 경제적 성공이었다. 에디슨이 받은 특허는 모두 1093종이었다. (생전에 받은 것은 1069개였으며, 24개는 사후에 주어졌다.) 이 기록은 아직도 전무후무한 미국 최다 기록이다.

그 가운데 돈을 벌겠다는 자본주의적 목적을 갖지 않은 발명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가 특허 획득에 실패한 500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수많은 회사를 설립했는데 모두 자신의 발명을 수익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그는 발명도 많이 했지만 남의 발명을 사들여 특허를 받기도 했으며 때로는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기도 했다. 에디슨은 전구의 발명으로 ‘멘로파크의 마술키네토스코프사’로 불렸지만 사실 그것은 완전한 독자적인 발명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다른 전구 발명자들과 치열한 소송이 계속 벌어졌다. 에디슨은 미국에선 소송에 이겼지만 영국에선 패했다. 하지만 에디슨은 더 싸우기보다는 영국에서의 전구 제조는 소송 상대였던 자와 손잡고 함께 하는 쪽을 택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업이었다.

헨리 포드

천재의 욕망을 존중한 미국

물론 에디슨도 당연히 실수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은 전력사용에서 직류를 고집한 것이었다. 에디슨은 전력사업을 위해‘Edison General Electric’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 유명한 미국 GE의 전신이다. 그런데 에디슨은 고집으로 인해 자신이 만든 이 회사를 결국 잃게 됐다. 교류 사용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테슬라였는데 원래 에디슨 회사의직원이었다. 그는 에디슨사를 나와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교류 전력 사업을 본격화했다. 피 터지는 전류 사업 전쟁이 벌어졌고 당연히 에디슨이 패배했다. 교류의 우수성은 너무나 명백했다. 에디슨의 고집으로인한 회사의 피해는 막대했다.

결국 에디슨은 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에디슨제너럴일렉트릭은 다른 경쟁사와 합병을 거쳐 에디슨이라는 이름이 빠진‘General Electric’즉 오늘날의 GE라는 회사로 재탄생하게 됐다. 이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이 GE에 구축한 연구개발(R&D) 시스템은 이후로도 GE의 강력한 힘이 됐다. 에디슨은 최초의 R&D 중심 CEO였다. 어떤 점에서 그는 스티브 잡스와 비슷한 데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큰 공통점은 둘 다‘사업가’였다는 점이었다.

삼성과 특허전쟁을 치르게 한 잡스처럼 에디슨도 사업을 위해서라면 가차 없는 특허전쟁도 불사하는 사람이었다. 둘 다 모두 슈퍼스타급 인기인이었다는 점도 닮았다. 에디슨은 살아생전 이미 미국의 전설이었다. 잡스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대중들은 물론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하딩과 쿨리지도 에디슨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단순히 발명왕이어서만이 아니었다. 1920년대의 영웅은 거인 기업가들이었다. 에디슨은 그 중에서도 특히 더 두드러진 존재로 당시의 영웅적인 기업가군을 이끄는 리더였다. ‘( 모던타임스’폴존슨) 발명도 발명이지만 그는 자수성가한 위대한 기업가로도 큰 존경을 받았다.

에디슨은 아메리칸 드림의 살아 있는 표상이었다. 에디슨을 우상처럼 존경한 사람 중에는 미국의 자동차 왕 포드도 있었다. 그도 에디슨의 직원이었다. 1896년 8월 뉴욕에서 열린 에디슨조명회사 중역회의 폐회식 만찬, 말석에 있던 디트로이트에디슨사의 수석 엔지니어 헨리 포드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 포드는 에디슨에게 자신이 만든 휘발유 내연기관 엔진을 열심히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에디슨은 포드에게 작심하고 한번 매달려 보라고 격려했다. 에디슨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소리가 나게 내리치며말했다.“ 한건잡은거야. 놓치지말라고.”(<2030 에너지 전쟁> 다니엘 예긴)

에디슨의 격려는 결정적이었다. 포드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결국 미국을 가솔린 자동차 시대로 이끌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역할을 포드가 하게 된 건 분명 에디슨의 격려 덕분이었다. 그런데 포드를 그렇게 격려했지만 정작 에디슨 자신은 점차 전기차 쪽으로 기울었다. 물론 승리는 당연히 가솔린 쪽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헛수고는 아니었다. 전기차가 다시 주목을 받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에디슨에 대해선 어떤 고정관념이 있다. 발명에만 심취한 ‘오타쿠’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에디슨은 자본주의 정신에 누구보다도 투철한 천부적인 사업가였다. 에디슨의 성공은 개인의 천재적 자질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 체제자체의 성공이었다. 미국에선 에디슨이 슈퍼스타였지만 같은 시대 유럽에선 그런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 뒤 비슷한 인물이 나오긴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버리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이었다. 망명한 아인슈타인은 이번엔 미국에서 스타가 됐다. 그게 미국의 힘이었다.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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