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들 살려 온 ‘홀트’ 비난하는 못난 대한민국
고아들 살려 온 ‘홀트’ 비난하는 못난 대한민국
  • 이원우
  • 승인 2014.04.15 06: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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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트일산복지타운

지난 2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작년 가을 홀트아동복지회(이사장 말리 홀트)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된 세 살배기 현수 군이 104일 만에 사망했다.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한국 담당부서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양아버지 브라이언 패트릭 오캘러핸은 “현수를 샤워시키려 도와주는데 현수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고 이튿날 오후에야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미 현수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공식 사망 판정을 내린 병원 측은 두개골 골절과 체내 출혈, 몸 전체에 걸친 타박상 등 구타에 의한 외상으로 사인을 확정지었다.

미국엔 ‘충격’ 한국엔 ‘논란’

담당판사는 양아버지 오캘러한에 대해 보석금 없는 1급살인 혐의와 아동 학대 혐의를 적용해 구속했다. 양어머니인 제니퍼를 비롯한 가족들은 “그는 절대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입양아 현수군 사망사건’의 전말이다.

이 사건이 한국과 미국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건 당연했다. 다만 양국의 반응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미국은 주로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오캘러핸의 유죄 여부와 형량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반면 한국의 여론은 현수를 미국으로 입양 보낸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해 책임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결국 보건복지부는 지난 9일부터 홀트의 해외입양 수수료 책정근거와 수수료 사용처 등에 대해 2주간의 특별감사에 착수했다. 재원구조 및 운용 현황을 포함한 업무 전반의 적법성과 타당성을 세밀히 따져보겠다는 취지다. 입양기관이 받는 국외입양 수수료의 상한액을 제시하는 방안 또한 검토할 예정이다.

현수 군이 사망한 사유가 양아버지의 폭행으로 추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홀트의 ‘수수료 적정성’을 특별감사하는 것은 전형적인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식 희생양 만들기’라는 지적도 있다. 부산외대 신입생 환영회 붕괴사고 때문에 모든 대학생들이 MT를 갈 때 담당 교수와 동행해야 하는 등 새로운 규제가 생기는 것과 같은 패턴이라는 것이다.

현수 군 사건 이전부터도 보건복지부와 홀트는 미묘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입양특례법’ 때문이다. 정부는 2011년 8월 기존의 ‘입양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을 ‘입양특례법’으로 개정했다. 가능하면 생부모 밑에서 자라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차선책으로는 국내 입양을 우선하며, 해외 입양은 최후의 수단으로 한다는 목표가 담겨 있는 법이다.

이 법의 취지대로라면 해외입양 업무를 하고 있는 홀트아동복지회의 업무는 아무래도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덧붙여 정부는 아동인권 침해를 최소화한다는 목적을 표방하며 입양과정을 일선기관에만 맡겨두지 않고 적극 개입할 의지를 표명했다.

이 와중에 현수 군 사건이 발생하자 9곳의 시민단체들이 보건복지부에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이들은 입양가정에 대한 사전 검증과 사후 관리를 사설기관에 사실상 모두 맡기고 있다는 점, 보건복지부의 관리감독이 허술했다는 점, 해외입양 시 해당 기관이 받는 수수료에 상한선이 없다는 점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이 질의서가 결국엔 홀트에 대한 특별감사로 이어진 것이라 봐도 틀리지 않은 셈이다. 정부가 더 깊게 개입해서 절차를 까다롭게 만들면 현수 군 사건과 같은 비극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말리홀트 이사장

홀트 이사장 “전쟁 직후 해외입양의 목적은 생존”

보건복지부의 특별감사가 시작된 바로 그날, <미래한국>은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홀트일산복지타운을 찾아 말리 홀트 이사장을 인터뷰 했다. 말리 홀트 이사장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한국 고아 8명을 입양한 것을 시작으로 복지사업을 시작한 설립자 해리 홀트의 딸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묻힌 장소이기도 한 일산복지타운에서 60년 가까이 고아들을 돌보고 입양가정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다.

1935년생인 그녀는 아직도 미혼이며 최근에는 골수암 투병 때문에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불편한 그녀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었다. 중간 중간 눈물을 흘리면서도 모든 질문에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을 해왔다.

 

 

현수 군을 입양한 양아버지 오켈러헨과 그의 부인

다음은 그녀와의 일문일답.

- 건강은 좀 어떠세요.

암 치료는 잘 되고 있는 중이에요.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는데 어제 갔더니 투석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호전되고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대상포진 증세가 1년 넘게 이어지고 있어서 그게 좀 힘들어요. 평생 활동적으로 살았는데 갑자기 아프니까 지루하지만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고 계셔서 늘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에 커다란 위로를 받았어요.

- 1956년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오셨고 미국에서 간호학교를 다닌 기간을 제외하면 스물한 살 때부터 50년 넘게 이곳에 계신데요. 한국의 변화를 다 보셨겠네요.

맞아요.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한국인들은 특별히 하나님께 축복 받았다고 생각해요. 어렵고 힘든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계속 발전을 했습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를 완전히 바꿔놓았어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故 해리 홀트)도 특별히 그 분을 좋아하셨고 육영수 여사도 저희 시설을 찾아주셨어요.

제가 처음 한국 입양시설에 갔던 게 1959년인데 그땐 한 달에 10명꼴로 아이들이 들어오고 또 10명꼴로 아이들이 죽었어요.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해외입양을 보내면 그래도 살아줘서 그게 그렇게 고마웠어요.

- 그런데 사실 해외입양에 대한 시선이 그렇게 곱지만은 않습니다. 부끄러운 일이라는 건데요. (※ 현재 한국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해외입양을 많이 보내는 나라다.)

버려진 아이들의 관점에서 봤으면 좋겠어요. 다른 나라는 부모가 아이를 버리면 꼼짝없이 죽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도 초기에 가난했을 때에는 그랬어요. 전쟁 직후엔 전쟁고아와 혼혈아들이 10만 명이나 됐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그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해외입양을 생각했어요.

그땐 제대로 된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부가 직접 외국인 양부모와 아이들을 연결했습니다.

다른 나라는 아이들이 죽더라도 정부가 관여하지 않았지만 한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그 문제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 숫자가 많았던 거예요. 이제 와서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게 그래도 아이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항상 아이들이 가정(家庭)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해리 홀트가 본격적으로 민간 차원의 해외입양을 추진한 이후 1960~1970년대에 해외입양은 급격히 증가했다. 1980년대에는 연간 7000∼8000명의 어린이가 입양됐으며 1985년에는 8837명에 달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고아수출국’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1990년대에는 2천명 규모, 2000년대 1천명 규모로 숫자가 줄었다.(‘고아 수출’은 북한의 대남 비방 방송 ‘단골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입양특례법 추진으로 국내입양이 우선시되면서 숫자가 더 줄고 있다.

숨진 현수 군의 모습

- 최근 현수 군 사건 때문에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고 있는데요. 오늘(9일)부터 홀트에 대한 특별감사도 시작됐습니다.

입양 수수료 문제는 몇 년 전에도 감사가 나온 적이 있어요. 저희 홀트는 다른 해외입양 기관보다 그때 기준으로 2000~3000달러 정도를 적게 받았어요. 총 20일 가까이 감사를 받았지만 별 문제가 없어서 떠나면서 그 분들이 미안하다고 했던 일이 있어요.

이 세상에 완전한 가족은 없어요. 저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나곤 해요. 할 수 있는 만큼 좋은 가족을 찾기 위해 많이 노력합니다. 아직까지 그 양아버지에 대한 재판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닌데 너무 모든 걸 사실로 생각하고 언론이 크게 부풀리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저희가 기독교 기관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문을 닫았으면 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현수는 특수 아동이었어요. 너무 일찍 낳아서 머리가 큰 편이었어요. 입양특례법을 만들어서 국내 입양을 우선한다는 의도는 물론 이해가 가지만 한국인 가족들은 특수아동을 꺼리고 또 혈액형을 고른다거나 하기 때문에 매치하기가 쉽지 않아요. 현수도 시설에서 굉장히 오래 머무른 편이었고 그런 아이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시간은 가고 아이들은 자라나는데 입양도 못 보낸다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에요.

그녀의 눈물은 ‘고아 수출국가’임을 부끄러워하는 한국인들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고아의 수출을 부끄러워하기 이전에, 우리는 고아들과 입양아들이 살기에 과연 미국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고 있는가?


글·사진/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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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22-11-22 16:28:22
돈받고 기사 작성했나? 기레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