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54주년 그날의 주동자를 만나다
4·19 54주년 그날의 주동자를 만나다
  • 이원우
  • 승인 2014.04.1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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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
 

1960년 4·19가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든 한국인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4·19를 주도한 사람 역시 ‘역사적 인물’로 추앙받아야 온당하지 않을까? 당연할 것 같은 이 연역법은 의외로 저항에 부딪친다. 사건 이후 각자의 길을 걷게 된 4·19 주역들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영일.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58학번. 1960년에 대학교 3학년이었던 이 남자는 누가 뭐래도 당시 4·19를 주도했던 서클 ‘신진회’의 선봉장이자 시위의 기획자였다. 다만 그와 그의 동지들에게 4·19는 조국 근대화와 빈곤 탈출의 열망 분출이었지 좌익운동이 아니었다.

“4·19와 5·16이 갈등관계일 이유 없다”

당시의 포인트를 ‘빈곤 탈출’로 잡느냐 아니냐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파생시킨다. 지긋지긋한 가난에 대한 탈출구의 모색으로 4·19를 이해하면 이듬해 봄 박정희의 5·16을 ‘혁명’으로 수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도 그랬다.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고 말했고 장준하 역시 “민족적 활로 개척”을 명분으로 박정희 세력을 지지했던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4·19의 주역은 54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4·19는 근대화를 열망하는 몸부림이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당시 ‘뭣도 모르고’ 욕했던 이승만이 사실은 뛰어난 통찰의 소유자였다는 깨달음 정도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누군가는 그의 역할을 평가절하 한다. 누군가를 그를 변절자라고 손가락질 한다.

대체 1960년 4월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건 54년을 맞고 있는 2014년 봄의 어느 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83학번인 황성준 본지 편집위원이 58학번 선배이자 4·19의 주동자인 이영일 前 의원을 인터뷰 했다. 3선(11대 12대 15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현재는 한중문화협회 총재직을 맡고 있지만 그날의 얘기를 할 때면 여지없이 20대 청춘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수십 번을 반복하고 전승했을 기억임에도 새롭게 해석되고 발견되는 부분은 존재했다.

- ‘원론’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선배가 정말 ‘주동자’ 맞습니까?

서울대 문리대 ‘신진회’ 멤버로서 거리에 나섰으니 그렇게 지칭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월 19일이 용의주도한 계획 속에서 정해진 날짜는 아니었어요. 당시 자유당에 대한 분노는 이미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배움의 길만이 학생의 본분인지에 대한 토론도 격렬했죠. 창백한 지식인으로 남을 것이냐, 거리로 뛰쳐나가는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 같은 청년이 되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결국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수렴됐습니다. 그 상황에서 서울대 하나만으로는 세가 약하니까 고려대 연세대 등과의 연계가 추진됐고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먼저 데모를 시작해 버린 것이죠. 선언문을 낭독하는 과정에서 자유당 정치깡패들이 동대문 일대에서 폭력을 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때부터는 날짜고 뭐고 없어진 겁니다. 저희도 당장 준비에 들어갔고요.

시위에 나선 고등학생들

우발적으로 시작된 시위 … 허겁지겁 작성된 ‘명문’

-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으로 시작되는 이수정 선배의 4·19 선언문은 시대의 명문(名文)으로 손꼽히는데요. 이것도 오래 준비된 건 아니었겠군요.

전혀 아니죠. 그냥 정치학과회가 중심이 돼서 선언문을 기초하자는 얘기만 나온 상태였어요. 사실 처음으로 선언문을 기초했던 건 나중에 외교관이 된 정치학과 이장춘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진회 회장이던 윤식이 읽어보고 “좀 약하지 않냐”고 주저했어요. 그러다 봄방학 끝나고 올라온 이수정이 4시경에 도착한 거죠.

이 친구 스타일이 원래 굉장히 열정적이고 글을 잘 썼어요. 4·19 선언문도 그 자리에서 바로 썼던 거고요. 심사위원들이 있긴 했지만 혼잡한 와중이라 심의할 틈도 별로 없었어요.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서 당시에 명필로 유명했던 황선필(이후 청와대 대변인, 문화방송 사장 등 역임)이 글씨를 쓰고 사학과 합동연구실 하정옥 선배가 가리방(등사판)을 찍었죠.

- 선언문 말고도 준비할 게 많았을 텐데요.

일단 정치학과 회비로 현수막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게 수위에게 발각이 돼서 총장 비서실 쪽에서 “자중하라”는 지시도 내려왔습니다. 시위 안 하는 것처럼 위장한 뒤에 선동 책임자인 저는 잠도 못 자고 밤새 과방을 지켰죠.

다음 날 교실에 들어가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이용희 교수님께서 수업 중이셨어요. 정말 완고한 분이시고 학생들이 수업 중에 나가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분이셨는데, 제가 들어가니까 “이 군이 왔군. 그럼 수업이 안 되겠잖아” 하시면서 먼저 나가는 겁니다. 밖으로 나가라는 신호였죠. 그때 수업마다 교수들이 전부 그렇게 나가라는 분위기로 동조를 해줬어요. 함께 나가지 못했을 뿐 호응을 했던 거죠.

그렇게 문리과대학을 돌고 나서 구름다리 넘어 법대로 뛰어갔더니 문리대 신진회와 법대 사회법학회 학생들도 나와 있고 하여간 서울대 전체가 뒤집어졌어요. 저는 시위 과정에서 곤봉에 맞아 안경이 깨지기도 했는데 그때 생긴 흉터가 아직도 있어요. 경찰에 연행도 됐지만 시청 앞에서 놓아주기에 다시 서울대 쪽으로 갔는데,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상처를 붕대로 싸고 나올 때까지 같이 있었던 게 사망한 김치호예요. 국수 한 그릇 먹는 사이에 도서관에 들러야 된다면서 청와대로 갔다가 총에 맞아 사망한 거죠.

- 하루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여전히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재생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소위 지하서클에서 ‘운동’하던 시절 4·19에 대해 교육을 받을 때마다 나온 내용은 이런 거였습니다. “서울대 신진회 중심의 서클들이 촉발은 시켰지만 결국 운동의 핵은 무산대중이었고 학생들의 지도력은 상실됐다.”

온 나라가 난리가 났으니까요. 저희 학생들은 혼란 틈에서도 질서 유지를 하기 위해 나서기도 했는데, 파출소 방화나 이기붕 부통령 집에 불을 지르는 식의 과격 행위는 우리는 전혀 모르는 소행이었어요. 파괴와 혼란, 무질서가 레닌이 말하는 ‘혁명에서의 정상적 질서’라면 그걸 만든 게 소위 ‘밑바닥 정서’였던 건 맞죠. 학생들이 어떻게 파출소에 불을 지릅니까. 그런 짓은 안 한다는 소위 인텔리적 자존심 같은 게 그 당시 대학생들한테는 있었거든요.

1960년 4월 20일자 동아일보

“정권 무너질 것 예상 … 사회 전복이 목적은 아냐”

- 심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작 본게임에서 인텔리들은 도망쳤다”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혁명의 목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죠. 그 당시 시위를 주도한 우리는 부정선거를 바로잡아서 정당한 정부로 바꾸자는 게 목적이었거든요. 사회를 근본적으로 전복하고 계급혁명을 하자는 건 아니었습니다. 지긋지긋한 빈곤으로부터의 탈피와 근대화야말로 우리가 생각한 진짜 과제였어요. 사실 우리가 정권을 접수하겠다는 목적으로 밀고 나갔으면 그렇게까지 전 국민적인 호응이 일지는 않았을 거예요.

- 시위가 성공할 거라고는 예상하셨습니까?

정권이 물러나리라는 정도는 예상했어요. 그 당시 전국적인 데모는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거든요. 학생들이 정권을 잡는다거나 괴뢰정부를 꾸릴 생각은 전혀 없었고, 민주당에 꽤 기대를 거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다만 저는 한 가지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근대화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후진성 극복에 대한 갈구로서 4·19가 불거진 것이지 민주주의와 같은 불확실한 개념이 핵심은 아니라고 봤거든요. 그런데 민주당이 상당히 그런 쪽(민주주의 이념)으로 접근을 하는 게 그다지 성공할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시 ‘후진국에서의 민주주의 의회정치의 한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 ‘신진회’라는 서클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는데요. 워낙 전설 같은 얘기도 많습니다만, 어떤 조직이었나요?

한 마디로 요약하면 독일 사민주의에 대한 연구로 시작된 단체입니다. 그 당시 신진회 멤버치고 독일 정당사 안 읽은 친구는 없었거든요. 한국 같은 분단체제에서는 자유만 갖고서는 안 되고 평등 해결도 중요하다고 봤던, 그 당시 가장 진보적인 사상들을 연구한 단체죠. 뭔가를 액션으로 옮기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4·19라는 시대적 행동이 이행됐지만 4·19 체제를 끌고 나가겠다는 이념적인 리더십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오적'이 실린 1970년 사상계 5월호

“내 논문 대신 실린 게 김지하 시인의 五賊”

- 그랬던 선배가 5·16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를 했다는 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사학계 주류는 5·16이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은 거라고 보고 있는데요.

그렇죠. 4·19가 10주년을 바라보던 1970년 봄에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상계’ 5월호에 논문을 기고하려고 했어요. ‘4·19혁명의 발전론적 고찰’이라는 제목이었고, 4·19와 5·16은 상호 보완적 관계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반발은 없었나요?

많았죠. ‘사상계’ 발행인을 지낸 부완혁도 현실에 아부하는 글이라며 싫어했고요. 문제는 애초에 제 논문을 ‘사상계’ 리드로 뽑으려고 했다는 거였죠. 계획에 엄청난 차질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그 무렵 누군가가 황활원 편집장에게 김지하의 ‘오적’이라는 시를 보내왔어요. 부완혁은 “이런 게 무슨 시냐”면서 던져버렸지만 당초 계획이 펑크가 났으니 페이지를 채울 겸 어쩔 수 없이 실었죠. 이게 결국 ‘오적 필화사건’으로 번지게 된 겁니다. 살아 있는 역사죠. (웃음) 결국 제 글은 1971년 4월에 ‘세대’라는 잡지에 나갔습니다만 역시 엄청난 반발에 부딪쳤어요.

- 좀 껄끄러운 질문인데요. 이영일 윤식 이수정 황선필 이영일 등의 인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전향’이나 ‘변절’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미 그 당시부터 5·16을 4·19의 보완으로 보셨다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전향’은 없었던 셈이 되는데요.

처음부터 우리가 생각했던 건 근대화와 빈곤 탈피였으니까요. 그걸 목표로 걸고 나선 박정희의 5·16을 갈등관계로 볼 이유가 없죠. 세계혁명사나 후진국 혁명사를 볼 때 군부의 역할이라는 게 늘 그런 식으로 표출이 됐어요. 저는 1968년 하반기에도 ‘사상계’에 ‘개발독재 발상법 서설’이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 당시 각국의 사례를 고려했을 때 박정희는 개발독재 코스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봤거든요.

- 그런데 사실 개발독재의 성공 사례는 한국 밖에 없는데요.

다른 나라는 전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발독재를 했거든요. 니카라과의 소모사, 아이티의 두발리에 등이죠. 그런데 한국의 박정희 개발독재만은 국력 배양이 우선이었고 사적 이익 추구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성공한 겁니다.

- 1963년 5대 대선 당시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가 경합했을 때 박정희를 지지하는 입장이셨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우리 눈에 윤보선은 ‘안국동 봉건 잔재’였으니까요. 이른바 혁신계는 전부 박정희를 찍었어요.

당시 한 가지 기억나는 게 김종필 씨가 문리대 정치학회 토론회에 와서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연설로 기립 박수를 받은 일이에요. 물론 그때도 김중태 같은 학생이 “양키의 더러운 똥 물결이 넘치고 있는데 무슨 근대화냐”고 떠들기는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종필의 강연은 서울대 지성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조국 근대화에 관한 하나의 지표였어요. 박정희의 혁명이라는 것도 지성인들의 협력 없이는 절대 불가능했을 거라는 거죠.

- 그랬던 박정희가 왜 이렇게까지 일방적인 반발에 직면하게 된 걸까요.

3선개헌과 유신 이후로는 매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거죠. 하지만 말년을 기준으로 혁명 초기의 흐름까지 똑같이 해석해 버리면 안 됩니다.

“이승만을 제대로 알았으면 4·19 힘들었을 것”

- 화제를 이승만으로 바꿔보겠습니다. 이승만의 집권 후기에 ‘타도’를 하신 셈인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 이후 어떻게 진행됐나요.

일단 그 당시 4·19에 앞선 대학생 가운데 이승만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부터 얘기해야 합니다. 독립운동 하신 분이고 애국자고 대한민국을 세운 양반이라는 것 정도 밖에는 아무도 몰랐어요.

이승만에 대한 공부는 모든 게 다 끝나고 난 뒤에 진행이 됐습니다. 공부를 쭉 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사람들이 이승만을 제대로 알았으면 4·19에 앞장설 용기도 안 났을 거라고요. 적어도 그 당시 우리가 생각한 이승만은 이승만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던 거죠.

- 어떤 부분을 가장 높게 평가하십니까.

해방 후 대한민국을 세운 방식이죠. UN 감시 하에 자유총선거를 했다는 겁니다. UN 방식에 의한 건국을 했다는 그 정통성은 소련군 점령사령관이 지명해서 세운 북한 정권하고는 근본적으로 달라요. 이건 이승만의 탁견이고 매우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백범이나 김규식 선생 같은 분들도 애국심이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 한반도의 운명을 어떻게 풀어갈지 고민한 사람은 이승만 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내려져요. 물론 해방 이후 건국 문제를 주변국과의 관계까지 고려하면서 고민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를 가진 것도 이승만 박사밖에 없었고요. 과보다 공이 훨씬 많은 분이에요. 이승만이 전쟁을 복구하고 문맹을 퇴치하고 농지를 개혁한 게 결국엔 4·19로 대표되는 민주화의 동력이 된 거고요.

- 그래서 4·19의 주역들을 ‘이승만 키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승만식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자라나서 “당신이 정한 원칙을 이행하라”는 의도로 4·19를 일으켰다는 거죠.

일리 있는 얘기예요. 제가 1939년생인데 선배들과 달리 왜정교육이 아닌 한글교육을 받은 세대예요. 이승만 자신이 확립한 교육이 현실과 안 맞았기 때문에 4·19를 일으킨 겁니다.

- 한편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폄하는 이제 아예 기정사실이 돼 가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두 사람을 히틀러나 스탈린과 거의 동급으로 바라보는데요. 어떻게 보시는지요.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비정상의 정상화’를 말씀하셨는데 여기에는 교육문제도 포함돼야 해요. 특히 정치 지망생들은 한국 현대사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현대사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4·19를 했던 나조차도 이승만 박사를 50년 후에야 공부해서 이제 겨우 개념을 잡았는데 현대사의 왜곡된 인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최근에 교학사 역사교과서 문제로 논란이 많았지만 제가 보기엔 교학사 교과서에도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좀 더 세련미 있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입증하기에 손색없는 교과서가 필요합니다.

- 격동의 역사와 현실정치를 모두 경험해보신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 주신다면요.

1980년에 독일 연방정치교육본부를 방문한 일이 있는데 거기 입구에 적힌 막스 베버의 글귀가 자주 생각납니다.

“어떠한 정부든 국민들에게 정부에 대한 귀속감을 느끼고 자기 정부를 사랑하도록 가르칠 능력이 없다면 오래 갈 수 없다.”

이 관점을 본받아서 국토통일원 교육홍보실장 시절에 통일교육 지침을 만들었는데 민주화 바람이 일더니 시스템이 전부 붕괴됐어요.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인터뷰/황성준 편집위원 hwang@futurekorea.co.kr
사진·정리/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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