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호전, 인류 최초 과학전쟁이 시작되다
참호전, 인류 최초 과학전쟁이 시작되다
  • 이춘근 박사
  • 승인 2014.05.22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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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⑤
 

전쟁이 시작된 1914년 8월 참전한 유럽 강대국들은 이 전쟁은 낙엽이 질 무렵, 아무리 늦어도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모두 자국이 승리한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래서 전쟁터로 달려가는 병사들과 그들을 환송하는 각국 국민들은 마치 축제라도 벌이는 기분이었다. 겨울옷을 지급받은 병사들은 없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8,9월 몇 주 동안의 전황은 이 전쟁이 기동전(機動戰. Manuever Warfare)이 될 것 같은 잘못된 인식을 심어줬다. 참전국들은 모두 군대의 신속한 움직임을 기초로 하는 결정적 공세전략을 갖고 있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잘 만들어진 영화 ‘워 호스(War Horse)’의 한 장면은 전쟁 초기 각국이 채택했던 공세적 기동전 방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멋있는 군복과 장화 그리고 멋진 칼을 장비하고 늠름한 말에 올라타 사기충천한 영국 기병대가 칼을 빼서 앞으로 겨냥한 채 전속력으로 대오를 맞춰 독일군 진지를 향해 달려간다.

참호 속의 병사들

상상하지 못했던 전쟁 양상

옛날이었다면 이 같은 기마 전술은 방어하는 적군의 전열을 단숨에 흐트러 놓을 수 있는 막강한 공격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멋있는 기병대는 방어하는 독일군 기관총 앞에 추풍낙엽보다 못한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 기병대가 독일군 기관포 앞에서 몰살 당하는 처참한 모습은 1차 세계대전 초기 전투의 한 단면을 잘 묘사해 준다.

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는 더 이상 낭만적이지도 영웅적이지도 못한 아비규환의 장이 되고 말았다. 영국, 프랑스, 독일 어느 나라도 무더기로 죽어가는 병력을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단숨에 베를린을 점령하고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겠다던 프랑스군의 희망도 물거품이 됐고 단숨에 파리를 점령, 개선 행진을 하겠다던 독일의 기대도 환상에 불과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겨우 두 달이 지난 1914년 10월 하순, 각국은 현대식 소총, 기관총, 포병 앞에서 정면으로 수행되는 보병 돌격전은 허무한 노력임을 알게 됐다. 전투의 방법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양측 병사들은 땅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를 공격하던 독일군은 자기가 점령한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참호를 구축했다. 프랑스 군과 연합군은 독일군을 쫓아내려는 목적으로 독일군 방어 진지를 앞서서 공격했다. 전선 돌파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임을 곧 인식한 연합군도 반영구적인 참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양측의 병사들은 이후 구덩이 속에서 적이 감행해 오는 공격을 분쇄하는 데 집중했다.

양측 병사들은 4년 동안 이 구덩이에 머물렀다. 수백만의 병사들이 수천 킬로미터 이상 길게 형성된 좁은 진흙 구덩이 속에서 살다가 죽어갔다.

참호 속에서 전사한 프랑스 육군 중위 알프레드 주베르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고 한다. “인간은 미쳤다! … 이 지독한 살육전이라니! 이 끔찍한 공포와 즐비한 시체를 보라! 지옥도 이렇게 끔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미쳤다!” [John Ellis, Eye-Deep in Hell: Trench Warfare in World War(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9) 에서 재인용]

1차 세계대전은 전쟁 초기 두 달 동안의 공세적 기동전을 제외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전선인 진흙 구덩이 속에서 양측의 병사들이 서로 상대방 참호를 향해 대포와 기관총, 소총을 쏴대며 살며 죽어갔던 참호전이었다. 참호의 깊이는 병사들의 키보다 더 컸고 사격할 때는 사격판 위에 올라서야 했다. 경계병들은 참호 밖으로 머리를 살짝 내놓고 상대방의 참호를 바라봐야 했는데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상대방의 기관총이 겨냥하고 있는 높이가 바로 그 높이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더 높이 올라서서 가슴이나 어깨에 총을 맞는 것이 이마에 맞는 것보다 더 나을 지경이었다.

참호 건너기에 실패한 탱크

“인간은 미쳤다”

참호는 병사들이 먹고 자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의 지형 및 기후상 참호는 항상 물이 질퍽거리는 진흙탕이었고 비가 많이 올 경우 진흙탕에 빠져 익사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칠흑 같은 어둠, 추위, 질퍽거림은 참호에서의 삶을 지옥과 다를 바 없게 했다. 쥐와 이, 파리, 옴벌레, 벼룩, 구더기들은 참호 속에서 병사들과 함께 사는 더러운 동물들이었다. 병사들은 이 동물들이 옮기는 질병들 때문에도 쓰러져갔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서부전선에서 전투에 의한 사상자는 269만54명이었는데 질병과 감염으로 쓰러진 병사들은 352만8486명이나 됐다.

 

대포, 독가스, 저격수, 탱크

창과 칼의 시절에 병사들은 엉켜 붙어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싸워야 했다. 과학 전쟁의 시대가 개시된 후 장병들은 적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하고 싸우게 됐다. 1차 세계대전은 전쟁과 과학이 본격적으로 결합된 인류 역사 최초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과 상당거리 떨어진 참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양측 병사들이지만 사상자가 대폭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영국군 총사령부는 1916년 1년 중 대규모 공세를 단행한 6개월 동안 51만3252명의 병력을 손실했고 참호전이 수행된 6개월 동안에도 30만명을 잃었다고 계산했다.

양측은 참호전으로 전쟁 방식을 바꾼 후에도 상대방의 참호를 향해 매일 포탄을 퍼부어댔다. 거의 몇 발이라도 참호에 포탄이 떨어지지 않은 날이 없었고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 당했다. 지속되는 포사격과 폭탄의 폭발음은 공포를 극대화하는 것이었고 폭사하지 않은 병사들도 거의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포병의 공격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쟁 기간 동안 영국군이 발사한 포탄은 1억7000만발 이상이었다. 파괴력으로도 500만톤이 넘는 것이었다. 영국군은 4년 동안 적군을 향해 히로시마급 핵폭탄 250발 이상을 발사한 것이다. 영국군이 발사한 포탄은 하루 평균 10만발이 넘었으며 1917년 9월 어느 날 영국군은 100만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기도 했다. 독일이나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로 포탄을 무수히 쏴댔다. 독일군이 9일 동안 쉬지 않고 폭탄을 쏴대는 동안 참호 속의 프랑스 병사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병사들은 신경이 완전히 탈진해 혼수상태에 빠져들기도 했다.

특히 독가스탄은 공포의 극치였다. 1915년 4월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독가스 공격은 곧 바로 양측 모두가 사용하게 됐다. 독가스는 전쟁의 잔임함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오늘날 독가스를 사용하는 국가나 인간은 반인륜적 범죄를 행한 것으로 인식될 정도로 독가스는 비인간적인 무기다.

참호 속의 전투는 저격이라는 새로운 전투 방식을 만들어냈다. 저격은 대규모 포격 혹은 진흙탕처럼 성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지속적인 짜증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머리를 들어 올린 사람은 누구나 저격을 당할 정도로 저격수의 공격은 집요했다. 독일군이 특히 저격수를 잘 활용했는데 독일군은 연을 날리거나 영어가 쓰여 있는 표지를 휘둘렀다. 그것을 읽겠다고 머리를 내민 어리석은 병사는 곧바로 총격을 당했다.

영국은 참호전을 치르는 서부전선의 영국군 보병들이 기동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다가 새로운 무기를 발명했다. 사방이 강철로 씌워진 기동 차량 즉 탱크가 발명된 것이다. 1914년 가을부터 구상된 새로운 개념의 무기는 1916년 6월 실전에 배치됐다. 탱크는 참호전을 다시 기동전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무기가 된 것이다.

탱크는 적의 참호와 참호 속의 병사들을 깔아뭉개 버리는 새로운 살인 병기로 등장했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셔먼 장군은 전쟁을 “지옥” 이라는 한마디로 묘사했다. 셔먼 장군의 말처럼 전쟁은 지옥이고, 주베르 중위가 기록했듯 전쟁은 미친 짓인데도 불구하고 국가들은 끊임 없이 전쟁을 치러왔다. 앞으로도 전쟁이 사라질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전형적인 참호의 구조

처절한 전장의 교훈

우리나라 정치가들 중에는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이 말을 분석적으로 해석하면 ‘전쟁보다 차라리 항복이 낫다’는 황당한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영국의 유명한 전략가 마이클 하워드는 “전쟁은 악이다. 그러나 무력의 사용을 포기한 자(즉 전쟁을 포기한 자), 곧 그렇지 않은 자의 손아귀 속에 자신의 운명이 맡겨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독일의 손아귀 속에 조국의 운명이 맡겨지는 것보다는 처절한 전쟁터로 달려나가 희생될 것을 각오했다. 그들은 조국을 위한 극한(極限)의 임무를 쾌히 담당했다. 이들의 희생 때문에 오늘의 영국과 프랑스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전쟁터의 처절한 모습은 국가와 전쟁 그리고 국민의 임무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나라가 요구하는 극한의 임무를 감당하겠다는 젊은이가 많은 나라, 그런 나라가 바로 강대국이다.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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