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의 낭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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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4.06.0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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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귀의 고전읽기] 바이런 著 <바이런 시선>
 

19세기 초반 영국의 후기 낭만주의를 이끈 3대 시인의 공통점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이다. 바이런(Byron)은 36세, 셸리(Shelley)는 29세, 키츠(Keats)는 26세의 혈기 넘치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20년대 초반의 일이다. 이들은 극적인 짧은 인생만큼이나 영국 시단에 강렬한 자취를 남겼다.

이들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끄는 사람은 유난히 그리스 문명에 심취하고 찬미했던 바이런이다. 그는 단순히 그리스 문화에 탐닉하는 정도를 넘어 19세기 초 투르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리스 무장독립운동에 직접 참전했다가 열병에 걸려 객사했다.

그리스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안고 생을 마감할 정도로 격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타국인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으로 기림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자유와 정의를 추구한 그의 고귀한 정신 때문이다.

조각 같은 외모로 뭇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바이런, 천재이자 미남이던 귀족 바이런은 자유분방한 생활과 지나친 쾌락의 추구로 귀족계급과 사교계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시는 그의 자유로운 정신만큼이나 당시 유럽 사회의 부조리와 위선에 대한 풍자적인 공격을 마음껏 펼치는 한편, 영혼의 방황의 쓰라림과 달콤한 사랑을 노래했다.

바이런의 다양한 작품이 우리나라에 완역돼 소개된 것은 아직 없다. 바이런이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유명해졌더라”는 문명(文名)을 날리게 만들어준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12)조차 소개되지 못했다. <바이런 시선>은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와 <돈 주앙> 등 그의 대표작에서 뽑은 50편의 시가 담겼다. 그나마 아쉬움을 달랜다.

그는 무모할 만큼의 열정적인 기행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인 콘스탄티노플을 여행하던 중 바람이 거세 배가 나아갈 수 없게 되자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헤엄쳐서 건넜다. 가장 좁은 곳의 너비도 1km가 넘는다고 하니 그의 바다 수영 실력이 경이롭기만 하다. 한쪽발의 장애를 안고 살았던 그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남달리 체력을 강인하게 단련한 덕분이었을 것 같다.

그가 그토록 위험을 감내하는 모험을 한 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레안드로스(Leandros)와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바이런의 충동적 격정을 잘 말해준다. 이런 일화는 바이런에게 애모의 마음 품었던 수많은 여성들을 매혹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이 아니었을까?

<바이런 시선>에는 바이런 특유의 풍부한 감성이 넘치는 연애시도 많지만 그리스의 자연과 역사 문화에 대한 회억과 찬탄이 담긴 시도 여럿 있다. <돈 주앙>에 나오는 ‘그리스의 섬들’이라는 시가 대표적이다. 이 시에는 그리스 문명에 대한 바이런의 애탄이 그대로 드러난다.

바이런이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자유를 지켜낸 마라톤 평원과 살라미스 바다에서 그리스의 과거 영광을 찬미한 것도, 투르크에 압제 당하고 있던 그리스의 ‘노예적 삶’에 대한 비탄과 분노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정신이 마음껏 발현될 수 있었던 그리스 문명의 진수야말로 그의 방황하는 영혼의 안식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삶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 바이런은 그리스의 노예적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직접 그리스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던 이유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그리스의 자유를 갈구하면서 죽었다. 그리스는 그에게 제2의 조국이자 자유정신의 이상향이었다. 그가 타국인 그리스의 전쟁터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이유다.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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