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경제학자’ 박현채를 해부한다 (上)
‘빨치산 경제학자’ 박현채를 해부한다 (上)
  • 이원우
  • 승인 2014.06.0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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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①: 박현채 편


2003년 2월 25일 오전 11시.

옅은 안개가 서울 하늘을 감싼 그날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취임식이 있던 날이었다. 지구촌을 상징하는 둥근 형태의 중앙단상 측면 귀빈석은 안철수연구소의 CEO인 안철수 대표를 비롯한 국민대표 50인의 차지였다.

가수 양희은은 한때 운동권 가요로 분류됐던 ‘상록수’를 불렀다. 국립묘지 참배를 마친 새 대통령은 행사장에 입장해 취임사를 시작했다. 제목은 ‘평화와 번영과 도약의 시대로’였다. 개혁과 통합,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균형발전, 동북아사회…. 다 좋은 얘기였다.

그러나 이날의 취임사는 결코 날씨만큼 맑지도, 중앙 단상처럼 둥글지도 못한 다음의 표현으로 훨씬 자주 회자되곤 한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합니다.”

이날 분단된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둘로 갈렸다. 정의와 불의.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분할의 잣대를 잡는 역할은 물론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좌파진영 몫이었다.

참여정부의 이와 같은 이분법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똑 같은 좌파정부로 분류되고는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2월 취임사에서 ‘작지만 강력한 정부’ ‘철저한 경쟁의 원리’를 말하고 있었다. 특정 구절만 따로 떼서 보면 MB정부보다 더 MB정부 같았던 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사였다.

노무현의 이분법이 지속된 비결

이유는 두말 할 것도 없이 IMF 금융위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도래한 일촉즉발의 상황 앞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히트작인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1971)의 논조를 배반하고 ‘글로벌 스탠다드’를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취임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그의 앞에는 어마어마한 국제 호황이 예고돼 있었다. 참여정부 5년간(2003~2007년) 세계경제 평균 성장률은 4.8%였다. 반면 한국은 평균에도 못 미치는 4.3% 성장에 그쳤다.

이 데이터는 MB정부 시기 한국의 평균 성장률인 3.1%와 비교되며 ‘노무현이 이명박보다 경제운용을 잘했다’는 명제로 연결되곤 한다. MB정부 5년간(2008~2011년) 세계경제의 평균 성장률이 2.8%에 불과했다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국제 호황이라는 상황적 이점을 누리며 노무현 대통령은 세상만사를 둘로 나눠 사고하는 스스로의 방식을 국정운영에 마음껏 투사할 수 있었다. 2007년 6월 2일, 퇴임을 8개월 앞둔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평가포럼 월례강연회에서 밝힌 ‘보수와 진보의 정의’를 보자.

“보수는 강자의 사상, 기득권의 사상입니다. (…) 진보란 무엇인가. 힘 있는 사람이 누리는 권력을 약자로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힘없는 사람의 연대와 참여를 중시하는 생각입니다. (…) 보수는 그러면 연대하지 않는가. 연대하지요. 은밀히 유착하지요.”

대통령의 생각이 이렇게 고착된 상황에서 세상이 둘로 갈리지 않고 음모론에 휩싸이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분법과 증오, 전복의 가치관은 노무현 이후 ‘대세’가 됐다.

노무현 너머의 어떤 단단한 세계

질문은 남는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좌파-우파, 진보-보수의 이분법 사회가 된 것이 오로지 노무현 혼자만의 탓일까? 한때 인터넷을 휩쓸었던 유행어처럼 세상만사를 전부 ‘이게 다 노무현 탓’으로 몰아붙인다면 그건 노무현이라는 인물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처사가 될지 모른다.

다만 그는 하나의 아이콘(icon)이었다고 보는 편이 온당하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승리의 과정을 불만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일군의 세력, 한 묶음의 생각들은 노무현의 등장과 함께 양지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임기 후반 한미 FTA 추진으로 자신에 대한 기대를 남김없이 소진시켜버린 노무현이었지만, 적어도 그의 시대가 수많은 좌파 학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용기를 북돋운 반전과 부활의 시기였음에는 틀림없다.

이 국면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경제학자를 마주하게 된다. 잊을 만하면 끊임없이 거론되는 하나의 이름. 2005년은 이 학자의 사망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국 좌파학계의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성공회대학교는 이해 12월 그를 위한 10주기 추모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의 이론을 계승한 ‘민족경제연구소’를 설립한다는 추진안도 나왔다.

   
1987년 제2회 단재학술상 수상 강연을 하고 있는 박현채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現 서울시교육감 당선자)는 이 학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국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정립하고 진보적 이론과 실천을 통일시킨 전범이었다. 제3세계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인 그의 학문과 삶을 현대적 맥락에서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

경제를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의 대립으로 보았던 이분법 경제학의 대부. 소련이 붕괴된 이후 그 말만 들으면 내내 침울해졌다는 한 남자. 이 불온한 경제학자의 이름은 박현채(1934~1995)다.

10대에 ‘자본론’을 독파한 소년

박현채는 1934년 11월 3일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산 중턱의 할아버지 박화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경모는 면서기로 일하다 박현채가 5살이 되던 해 곡성세무서에 취직했다. 일제강점기에 조그마한 완장 하나라도 두른 기록이 있으면 전부 친일파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박현채 집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은 재미 있다.

8세가 된 박현채는 1941년 곡성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한다. 일제강점기의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시대의 어둠은 소년 박현채에게도 드리워졌다.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고 일본어를 사용하며 등교하던 그는 1944년 2학기 말 아버지의 전근과 함께 광주로 이사한다. 그리고 12살이 되는 해에 해방을 맞았다.

박현채의 글에 일본식 어투가 남아 있는 것은 언어습관이 형성되는 소년기를 일제 치하에서 보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언어와 함께 형성됐을 세계관(世界觀)의 형성은 무엇의 영향을 받았을까.

소년 박현채의 정신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꼽히는 사람들은 이모부와 당숙 등이다.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특히 이모부는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박헌영과 함께 활동했다. 주변 교사들도 한 몫을 했다. 광주 수창초등학교 교사 최충근이 소년 박현채에게 줬던 책은 모택동을 찬양하는 ‘중국의 붉은 별’(에드거 스노우)이었다.

박현채는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경제학자 박현채의 세계관이란 것도 큰 틀에서 보면 마오이즘(Maoism)을 추종하는 바 크다. 덧붙여 박현채를 찬양하는 많은 이들은 그가 이미 10대에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독파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박현채의 천재성을 부각시키곤 한다.

과연 그럴까. 모택동과 마르크스가 인류사에 촉발한 실패와 거대한 비극을 모른 척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경제학자 박현채가 범한 ‘거대한 오판’의 시발을 톺아보면 결국 철저히 편향된 소년기와 직면하게 된다. 그가 천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천재성의 토대는 주변 어른들의 극도로 편향된 영향력의 범주 안에 속해 있었다.

“고로 결론은 이렇다”

1947년 광주공업학교에 지망했으나 적록색맹으로 불합격한 그는 아버지의 모교이기도 한 광주서중에 합격한다. 그런데 입학식 전에 사달이 났다. 아버지가 파업사건에 연루돼 검거되면서 박현채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맑스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을 압수당한 박현채는 경찰국으로 잡혀 들어갔다.

공책에 그려놓은 이승만과 김구의 초상 중 이승만의 얼굴에는 ‘매국노’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찰과장은 “이승만의 매국 행위를 증명하라”며 소년 박현채를 구타했던 모양이다. 몇 대 맞으면 그의 생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미래의 대(大) 경제학자를 알아보지 못한 채 감행된 사찰과장의 구타는 소년 박현채의 기존 생각을 오히려 더 고착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광주서중 시절 박현채의 별명은 ‘박고로’였다고 한다. 그는 마르크스와 헤겔의 변증법 이론을 토대로 학우와 교사들에게 질문을 해대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는데, 그때마다 “고로 결론은 이렇다”라고 결착을 짓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에피소드조차도 박현채의 천재성을 입증해 주는 사례로 지금은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10대 시절부터 “고로 결론을 이렇다”를 남발하며 단 한 번도 도전받지 않은 채 한쪽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그의 도도함을 과연 천재성이라는 세 글자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조금만 비틀어 보면 거대한 편향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한편 건국 초기 대한민국의 상황은 요동치고 있었다. 4·3사건과 여수·순천사건을 통과하며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는 중학생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조직 관리에 힘쓰고 있었던 박현채에게도 일련의 행동을 요구하는 현실이었다. 내전에 준하는 상황, 반란군이 지리산 일대로 들어가 유격 활동을 전개하는 현실을 보며 결국 박현채는 ‘소년 빨치산’의 길을 선택한다.

1950년 10월, 6·25 남침 4개월이 경과한 시점에 박현채는 자발적으로 빨치산 광주지구 부대원이 된다. 그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2012년 김삼웅이 출간한 ‘박현채 평전’(한겨레출판)은 이 대목을 서술하며 일단 한숨을 내쉰다. 무장 항일운동의 한 맥을 차지했던 ‘빨치산’이 부정적인 용어로 낙인찍힌 것이 안타깝다는 논지다.

그러면서 이 책은 1930년대 중국 동북 지역의 무장투쟁 사례를 빨치산의 공적으로 손꼽는다. 여기에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지만 이건 사실 김일성과 그 동지들 중심의 투쟁사를 긍정적으로 조명하겠다는 왜곡된 역사관의 편린일 뿐이다. 북한에 의해 잔뜩 뻥튀기된 김일성의 활약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면서 ‘빨치산’이 긍정적인 뉘앙스를 획득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빨치산의 이름으로

더군다나 이 시기의 ‘항일 빨치산’을 박현채의 빨치산 활동과 직결시키는 데는 상당한 세심함이 요구된다. 6·25 이후 전개된 빨치산 활동은 그들이 스스로를 ‘조선인민유격대’로 호칭한 데서도 알 수 있듯 북한군에 동조하는 남한 좌익의 성격을 강하게 띠며 그들의 칼끝은 동족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 활동을 벌인 좌익의 숫자는 최소 2만에서 최대 6만으로 추산된다. 정규군을 압도할 수준이었다. 이 시기의 남한 좌익 활동이 결국 386세대를 태동시켰다고 주장하는 남정욱 숭실대 교수의 ‘굿바이 386’을 보자.

“6·25 전쟁의 특징 중 하나가 민간인 피해가 많고 또 그 죽음이 참혹했다는 사실이다. 민간인 사망자들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전선이 아니라 후방인 주거지역이었다. 사망 원인도 총격이나 포격이 아니라 죽창, 낫, 몽둥이에 의한 것이었으며 총격 사망의 경우에도 전투가 아니라 처형의 정황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상흔이 있었다. 남한 좌익들에 의해 벌어진 무차별 학살이었다.”

   
조선인민유격대(빨치산) 아지트 모형

박현채가 가입한 시기의 빨치산은 항일투쟁이 아니라 위의 시기에 가깝다. 이런 빨치산이 부정적인 용어가 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박현채 평전’의 저자 김삼웅과 비슷한 논지 위에서 빨치산의 본질을 왜곡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다.

빨치산의 잔혹성이 은폐될수록 17세 시절부터 사회에 문제의식을 갖고 빨치산의 길에 뛰어들었던 박현채의 위대함은 부각된다. 이 과정에는 철저히 박현채의 기억과 진술에 의존해 빨치산을 미화하는 소설을 쓴 ‘태백산맥’의 조정래도 충실히 복무했다.

작품 속 ‘소년전사 조원제’의 실존모델이 바로 박현채다. 박현채의 광주서중 후배이기도 한 조정래는 이 소년 빨치산 캐릭터에 특별한 의미를 담고 싶어 자신과 같은 조 씨를 부여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한 항렬이 높은 ‘제’자를 돌림자로 넣었고 ‘최고의 빨치산’이란 의미로 으뜸 원(元) 자를 넣어 조원제라는 이름을 완성시켰다. 이 에피소드 하나로도 박현채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10대에 자본론을 독파했고, 어른들을 압도하는 지성을 소유했으며, 결국 일생을 민족중흥의 경제적 사명 하나로 헌신했다는 것. 이것이 현재 박현채에 대한 좌파들의 평가다. 반면 우파들 사이에서 박현채는 점점 잊히고 있는 이름이다. 현재의 20~30대들에게 박현채라는 이름을 디밀어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경제학자 박현채의 그림자와 함께 살고 있다. 누군가 “경제적 보호 장벽을 높이는 규제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박현채주의자다. 누군가 “선진국들의 제국주의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제3세계가 고통 받고 있다”면 주장한다면 그는 박현채주의자다. 누군가 소규모 농촌공동체를 유토피아로 묘사한다면 그 역시 박현채주의자다.

그런 의미에서 박현채는 지금도 빨치산이다.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후배들의 생각 속으로 숨어 들어가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죽고 없지만 여전히 한국 좌파의 모든 길은 박현채로 통한다. (계속)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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