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흔들렸다
대한민국은 흔들렸다
  • 이원우
  • 승인 2014.06.1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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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의 교훈 - 인물보단 이념이다
 

8 대 9.
지난 6월 4일 치러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새누리당이 이긴 지역은 부산(서병수), 대구(권영진), 인천(유정복), 울산(김기현), 경기(남경필), 경북(김관용), 경남(홍준표), 제주(원희룡) 등 8개 지역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이긴 지역은 서울(박원순), 광주(윤장현), 대전(권선택), 세종(이춘희), 강원(최문순), 충북(이시종), 충남(안희정), 전북(송하진), 전남(이낙연) 등 9개 지역이다.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 정권과 여당인 새누리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기존의 구도였던 9:8에서 1석이 이동했을 뿐인 8:9라는 스코어는 대다수의 예상을 벗어난 결과였다. 그래서였을까. 선거 직후 새누리당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선거 다음날인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지도부 회의에서 이완구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국민의 빈틈없는 균형감각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유재중 비상대책위원의 “부산에서 심장이 멎었다가 심폐소생술로 살아났다(승리했다)”는 말에는 좌중에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방한 것은 ‘보수’가 아니다

의문은 남는다. 8:9라는 결과를 ‘보수의 선방’이라는 말로 치환해도 괜찮은 걸까.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 새누리당이 건전한 보수주의(Conservatism)를 원칙 있게 이어가는 탄탄한 우익정당이라는 명제다.

과연 그럴까? 새누리당이 획득한 8이라는 점수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전제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남경필의 경우 이번 선거에서 도저히 우익이라고 말하기 힘든 공약들을 남발하며 유권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대표적인 것이 ‘따뜻하고 복된 마을공동체’, 이른바 ‘따복마을’이다.
명칭에서부터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미산 마을공동체를 답습하고 있는 따복마을의 구상을 발표하며 남 후보는 “도지사가 되면 임기 동안 따복마을 6000개를 만들어 1만8000개의 사회적 일자리로 채우겠다”고 공언했다.

본지 미래한국은 지방선거가 치러지기 1년 전인 2013년 4월 ‘박원순 시장의 마을공동체가 수상하다’라는 단독보도를 내보낸 바 있다. 그리고 2017년까지 720억이라는 엄청난 예산을 들여 3000명이 넘는 활동가를 관주도 사업으로 지원한다는 박 시장의 마을공동체가 ‘생활좌파’의 풀뿌리 조직운동으로 전개될 개연성을 짚어낸 바 있다.

남경필 도지사가 이와 같은 구상을 경기도에까지 연장시키려는 것이라면 그의 소속이 새누리당이라 할지언정 경기도는 좌편향 노선을 걷게 될 수밖에 없다. 남 후보는 선거 한 달 전에도 “주요직책에 야당 인사를 등용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경기도 유권자 중 우파 성향이 뚜렷한 이들 사이에서는 ‘도대체 남경필을 왜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 선거 직전까지 터져 나왔다. 남경필 당선자의 최종 득표율은 50.43%. 경기도는 이번 선거의 대표적인 격전지였다.

득표율 59.97%로 비교적 여유 있게 제주도지사에 당선된 원희룡 당선자의 경우에도 우파 지향성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국회의원이던 2004년 “북한에 현금지원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수요모임에서 활동했으며 2005년 12월 한 인터뷰에서는 “김정일과의 평화공존을 통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해 충격을 줬다.

10년 전 과거에 노출한 이념적 지향성이 제주도 도지사로서의 도정(道政)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관계가 있다. 제주도는 우리 역사의 비극인 4·3사건의 가슴 아픈 현장이기도 했던 까닭이다.

원 당선자는 이번 선거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4·3특별법이 규정하고 있는 미해결 과제를 특별법 본래 취지대로 해결하고 4·3평화공원이 올바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 공약의 골간이었다.

명목은 그럴듯하지만 4·3특별법은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입맛대로 재단된 보고서의 관점을 답습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자칫 4·3사건에 대해 한 쪽으로만 편향된 정리 작업이 진행된다면 그 파급효과는 제주도라는 섬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를 분열의 도가니로 만들 수도 있다. 새누리당이 승리했으니 안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새누리당은 이겼지만 보수는 이긴 게 아닌’ 지역이 경기도와 제주라면 우파가 ‘불안한 승리’를 거둔 곳도 있다. 새누리당의 대표적인 텃밭으로 꼽히는 대구와 부산이다.

대구의 새누리당 후보 권영진은 55.95%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다른 격전지에 비하면 여유 있는 스코어였음에도 화제가 된 것은 이곳이 다름 아닌 ‘대구’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대구와 부산의 ‘불안한 승리’

대구는 박근혜 대통령이 1998년 4월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며 정계에 입문했던 ‘대통령의 친정’이다. 지난 2010년 치러진 제5회 지방선거에서 대구시장으로 선출된 김범일 한나라당 후보의 득표율은 72.92%였다(재선).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대구 득표율이 79.9%였음을 상기하면 이번 선거에서 대구 민심이 얼마나 크게 흔들렸는지를 알 수 있다.

대구의 표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또 다른 징후로는 기초의원 선거 결과를 들 수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기초의원이 9명이나 탄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10~20%대의 득표율로 2,3위권에 들어 당선된 경우지만 9명이라는 숫자는 이례적이다.

부산시장 새누리당 서병수-무소속 오거돈의 접전도 이번 선거 최고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50.7%의 표를 얻은 서병수 후보가 당선됐지만 49.3%를 얻은 오 후보와의 격차는 불과 2만701표에 불과했다. 2010년 선거의 경우에는 한나라당 허남식 후보가 55.42%를 얻어 3선에 성공한 바 있다. 18대 대선의 경우 부산이 박근혜 후보에게 60.3%의 표를 몰아줬음을 감안하면 대구와 마찬가지로 부산의 민심 역시 우파의 경계를 서서히 이탈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텃밭의 반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시선도 있다. 한국 정치의 오랜 병폐로 꼽히는 지역구도가 약화되고 있다는 암시로 읽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좌파의 텃밭인 광주광역시에서 새누리당 소속 구의원이 최초로 당선된 점은 ‘성지의 반란’으로까지 표현되며 화제가 됐다(광주 광산구 기초의원 박삼용 새누리당 후보). 1995년 지방선거를 실시한 이래 광역의원과 기초의원을 막론하고 광주에서 새누리당 계열 후보가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전체를 보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광주시장에 출마한 이정재 새누리당 후보는 불과 3.4%의 표를 얻는 데 그쳤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얻었던 6.1%보다 낮다. 전남도지사 이중효 새누리당 후보는 9.6%를 득표했는데 이는 두 번째로 표를 얻은 이성수 통합진보당 후보의 12.5%에도 못 미치는 수치였다. 전주시장 김병석 새누리당 후보는 9.0%, 전북도지사 박철곤 새누리당 후보는 20.5%를 얻었지만 모두 낙선했다. 전라도 지역의 좌파 결집세는 여전히 끈끈하다. 흔들린 것은 우파 텃밭뿐이다. 이번 선거에서 ‘지역감정 약화’라는 메시지를 읽어낸다 한들 그건 온 국민의 화합을 통한 성취 덕분이 아니다. 우파 진영의 붕괴에 따른 착시효과에 가깝다. 반가운 일일까?

마을공동체 공약을 발표한 남경필 경기도지사 당선자

근본 원인은 ‘펀더멘털 부재’

결국 이번 지방선거의 근본적인 메시지는 우파 진영의 근본, 이른바 펀더멘털(fundamental)이 흔들렸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념의 중심’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이 펀더멘털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한 가지 참담한 질문을 던지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건 바로 ‘과연 그 펀더멘털이 애초에 얼마나 탄탄하게 존재했느냐’의 문제다.

대한민국의 선거는 이념보다는 철저히 ‘인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대다수의 견해가 일치한다. 넓은 의미에서 ‘보수’로 포섭되는 유권자들은 사실 보수(주의)에 표를 던진 적이 없다. 김영삼에게, 이명박에게, 박근혜에게 던졌을 뿐이다.

하나의 인물이 모든 이슈를 대변하는 이 메커니즘을 효율적이라 볼 수도 있지만 탄탄한 대체 주자가 준비돼 있지 않을 경우엔 진영 전체가 위험에 빠질 소지가 있다. 세월호 사고처럼 국가적인 이슈가 터졌을 때 박근혜라는 한 인물에 타격점이 집중되면서 사실상 방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도출될 수도 있다. 이번 선거가 바로 그런 위험 속에서 치러졌다. 선거를 이틀 앞둔 2일 밤 JTBC 주최의 서울시장 후보 TV토론에서 정몽준 후보는 “박근혜 대통령의 성공을 바란다. 열심히 일하겠다”고 마무리 발언에서 밝혔다.

서울 시정에 대한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도 박근혜라는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가까운 사이’임을 인지시킬 수밖에 없는 게 현재 대한민국 우파 후보들의 현주소인 셈이다. 하지만 결국 서울시민들은 세월호로 타격을 입은 박근혜와 동기화한 정몽준이 아닌 박원순을 선택했다. 특히 새누리당의 텃밭으로 인식되던 강남3구 중에서 서초구와 강남구는 정몽준보다 박원순에게 더 많은 표를 줬다.

인물 중심으로 선거 프레임이 형성되다 보니 판세가 점점 ‘누가 더 명망가인가’의 싸움으로 빨려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정점이 바로 이번 선거에서의 ‘고승덕 사건’이었다.

청소년 대안학교 등에서 활동했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국회의원 시절 교육법안조차도 발의한 적이 별로 없는 고승덕 변호사가 단지 ‘유명하다’는 자신감 하나로 예산 7조5000억원을 다루는 서울시교육감 후보에 출마할 수 있는 구조가 바로 현재의 인물 중심 선거판인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고승덕 후보가 득표율 24.3%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선거 막판에 불거진 친딸의 폭로가 고 후보에게 막대한 악영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3대 고시를 패스하고 증권전문가로 활약했던 고승덕이라는 ‘인물’에 표를 던졌다는 방증이다. 결국 서울시교육감 자리는 좌파성향이 뚜렷한 조희연 후보에게 갔다. 이번 선거 최고의 반전으로 꼽히는 그의 당선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조희연의 낮은 인지도다. 서울 시민들은 스스로 뽑아 놓고도 조희연이 누군지 모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 후보들이 줄줄이 낙마한 사실에 대해 ‘보수가 분열해서 졌다’고 보는 건 지나치게 1차원적인 해석이다. 좌파는 ‘세력’ 단위로 움직이지만 우파는 ‘인물’ 단위로 움직인다는 점이야말로 진정한 패인이자 유효한 분석이다.

좌파의 촘촘한 조직력은 무명도 한순간에 ‘인물’로 만들 수 있다. 그 살아 있는 사례가 바로 조희연이고 박원순인 것이다. 웬만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5년 전에 박원순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지금 무명인 조희연은 앞으로 얼마든지 중요한 ‘인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 질문을 던질 차례다. 대한민국 우파 진영에는 무명을 인물로 만들 수 있는 토대가 존재하는가?

통합진보당, 97만2311표 득표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광역의원비례대표 후보들의 정당별 득표 현황을 분석해 보면 2014년 6월 4일 현재 어떤 정당이 얼마나 지지를 얻고 있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본지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의 데이터에 기초해 전국 광역의원비례대표 득표 현황을 정당별로 합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번 선거의 선거인수는 4129만6228명. 이 중에서 투표한 인원은 2342만7181명이다(투표율 56.7%). 이 중에서 새누리당에 표를 던진 인원은 1105만2710명으로 47.18%다. 새정치민주연합에 표를 던진 사람은 939만9480명으로 40.12%다. 위헌정당 해산 청구로 재판을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경우에도 97만2311표가 몰렸다(4.15%). 그외 정의당 3.51%, 노동당 1.19%, 녹색당 0.68%, 새정치당 0.27%, 한나라당 0.15%, 공화당 0.04%, 국제녹색당 0.03% 등으로 표가 갈렸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에 직접적으로 대립되는 정당을 새정치민주연합, 통합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국제녹색당 정도로 잡는다면 이들의 통합 득표율은 무려 49.68%로 새누리당을 압도한다. 대한민국이 양당제를 한다고 가정해 도식적인 해석을 하면 이번 선거는 우익이 근소하게 패배한 선거로 해석될 여지도 있는 셈이다.
좌파 진영이 여러 갈래로 분열돼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현재의 정치지형은 얼마든지 ‘정부 대 反정부’ 프레임으로 양분될 수 있는 상황이며 이 경우 박근혜 정부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진영의 패배는 기정사실이라는 점을 데이터가 말해주고 있다.

이번 선거의 진짜 교훈은 ‘새누리당의 선방’이나 ‘박근혜 정권에 대한 지지’ 등의 표피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펀더멘털은 이미 크게 출렁였다는 점, 얼마든지 전복될 수 있는 위험 속에서 대한민국 호(號)는 항해하고 있다는 점, 언제까지 인물에 기대는 선거를 계속할 것이냐는 점이야말로 이번 선거의 교훈이자 논제가 돼야 한다.

좋은 교사 이전에 좋은 교과서가 집필돼야 하는 것처럼 문제는 이념이다. 대한민국 보수주의의 이념을 탄탄하고 깊게 만드는 것만이 대한민국 호(號)의 평형수를 확보할 수 있는 대안일 것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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