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제국만이 세계를 제패한다
해양제국만이 세계를 제패한다
  • 미래한국
  • 승인 2014.06.1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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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⑥
 

1차 세계대전은 본질적으로 독일과 영국이 세계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다. 영국과 독일 양국 모두는 바다를 제패하지 못하는 한 세계 패권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이 기왕의 세계 패권국 영국에 대한 도전을 준비하면서 가장 공을 들였던 부분 역시 영국에 맞먹는 해군을 보유하겠다는 노력이다.

바다를 제패하지 못하면 패권국이 될 수 없다는 논리는 세계가 바다를 통해 하나의 단위로 연결된 이후 해로 즉 무역의 통로를 장악한 국가가 그렇지 않은 국가에 대해 가지게 되는 압도적인 전략적 우위로부터 유래되는 것이다. 세계의 자원과 그 자원의 통로를 장악 및 통제하고 있는 나라는 해양제국이며 오로지 해양제국 중에서만 패권국이 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을 1차 대전 발발 무렵까지는 물론 현재인 21세기 초반까지의 세계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그리고 오늘날의 미국 등 그 속성상 해양제국들만이 세계의 패권을 지속적으로 장악해 오고 있는 것이다.
해양제국은 우선 지구전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지 못한 나라에 비해 유리했다. 전쟁의 초기 해양제국들이 고전을 치른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그들은 전쟁이 장기화되면 될수록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대륙국가에 비해 자원과 물자의 확보가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대륙국가들은 세계 패권 장악을 위한 도전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륙국가 프랑스가 영국의 패권에 도전한 것이 1793년부터 1815년까지 지속됐던 세계적 대전쟁인 나폴레옹 전쟁이고 1차 세계대전 역시 대륙적인 독일이 영국의 패권에 대한 도전 전이다. 영국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제기한 패권 도전에서 승리, 1815년 이후 안정적인 세계 패권의 지위를 향유하던 중 약 100년만인 1914년 독일의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해전의 전개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영국과 싸울 준비를 상당히 갖추고 전쟁을 시작했다.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 이후 해군력 건설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던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개입이 영국의 개입으로 모두 번번이 실패하게 되자 영국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해군력 확장 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 독일 해군장관 티르피츠(A. von Tirpitz)는 1920년대 이를 때까지 영국과 대등한 해군을 보유하겠다는 목표 아래 대대적인 해군력 증강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겼다.

같은 군사력일지라도 해군을 증강하는 나라는 이웃 나라의 눈총을 더 강하게 받기 마련이다. 해군은 본질적으로 ‘힘을 투사’(power projection)하기 위한 군사력이라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1차 세계대전 직전 무렵 독일의 해군력 증강정책은 운명적으로 영국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은 독일 해군 증강 계획에 본격적으로 대응했다. 이에 독일 내부에서는 영국과 해군 문제를 협상으로 풀어야 하며 독일 해군력 증강 계획을 일부 완화하는 방향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티르피츠는 추호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몇 차례 시도됐던 영국-독일 해군 교섭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사라예보의 총성 한 발이 각국 육군을 총동원 시키며 대전쟁으로 진행되는 동안 유럽 강대국의 해군도 전쟁으로 빠져 들었다.

 독일의 U보트

영국에 맞서 해군력 증강에 노력했던 독일

1차 세계대전은 육지에서의 전투와 더불어 바다에서의 전투도 함께 시작됐다. 1차 세계대전을 이야기할 경우 우리는 대개 참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수백만 병사들이 대치하고 있는 유럽 대륙의 서부전선을 연상하게 되지만 1차 세계대전은 세계대전이라는 이름 그대로 전 세계의 바다 위 혹은 바다 속에서도 전투가 전개됐다.

1914년 8월 헬리골랜드(Heligoland)에서 독일과 영국 사이에 첫 번째 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독일은 3척의 경순양함과 1척의 구축함이 파괴당하는 패배를 당한다. 1915년 1월 도거뱅크 해전에서도 독일 순양함이 1척 격침됐다. 이후 유틀란트 해전까지 독일 해군은 자국 항구에 머물러야 할 정도였다.

1916년 5월 31일부터 6월 1일 사이 독일과 영국 해군은 유틀란트에서 다시 맞붙었다. 유틀란트 해전은 1차 세계대전 전쟁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 중대 결전이라고 말해도 되는 처절한 해전이었다. 이틀 동안의 전투에서 영국과 독일은 각각 6척, 총 12척의 전함(Battleship)을 상실했다.

당시 전함은 최대의 중무장을 갖춘 포함으로 오늘날 항공모함에 비견될 수 있는 해군의 최정예 군함이었다. 영국 역시 대단히 큰 피해를 입었고 톤수 상으로는 영국의 피해가 독일의 두 배에 이르는 것이었지만 영국은 북해에 대한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는 해군력이 남아 있었다.

 헬리골랜드 해전

당시 세계 최고였던 독일의 유보트 잠수함부대

전쟁을 신사(紳士)의 규칙이 적용되는 영역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손자가 말했듯이 전쟁 혹은 병법은 상대방을 기만하고 속이는 일이다.(兵者詭道也) 상대방과 당당히 싸워서 이길 능력이 없다면 몰래 숨어서 뒤통수를 공격하는 것이 전쟁의 상도다. 독일은 영국 해군과 정정당당하게 싸울 만큼 해군이 강해지기 이전 영국과의 전쟁에 빠져 들었고 독일은 영국 해군과 싸우기 위해 영국이 보기에는 지극히 비신사적인 무기와 작전을 채택했다.

독일은 어떤 나라보다 잠수함에 관심을 가졌고 유보트라고 불리는 당시 세계 최첨단의 잠수함 부대를 보유했다. 독일 잠수함 부대의 성과는 대단했다. 수상함 해전에서 영국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티르피츠는 카이저에 의해 해임 당하기도 했지만 독일의 잠수함은 영국 해군을 괴롭혔다.

전쟁 개시 직후인 9월 5일 독일 잠수함 U-21은 3000톤급 영국 경순양함인 패스파인더(Pathfinder)호를 격침함으로써 사상 최초로 잠수함에 의한 대형 군함 격침 사례를 기록했다. 9월 22일 독일 잠수함 U-9는 영국 장갑순양함 3척을 연이어 격침하는 기염을 토했다.

10월 11일 독일 잠수함 U-26은 러시아 순양함 파르라다호를 격침 시켰고 10월 15일 U-9은 영국 순양함 호크(Hawk)호를 격침 시켰다. 유틀란트 해전 이후 독일의 쉬어(Sheer) 제독은 대양에서 영국을 굴복시킬 방법은 없다고 결론내린 후 유일한 길은 무제한 잠수함작전을 통해 영국 경제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라고 황제에게 건의했다. 이후 독일의 잠수함은 적대국의 군함은 물론 화물선, 상선 심지어는 여객선까지도 무차별 격침하는 잠수함전을 개시한다.

물론 독일의 망나니 같은 군사작전은 이를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유틀란트 해전 이후 독일의 산업을 파탄내고 독일 국민을 아사 시킨다는 목적으로 장기전, 소모전 전략을 채택한다. 영국은 막강한 해군으로 유럽 대륙을 봉쇄하고 독일의 경제를 목조르기 시작했다. 영국의 대륙 봉쇄 전략은 1916년 말부터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일 각지에서 식량 부족으로 인한 폭동마저 야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처에서 식량 폭동이 야기되는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작전으로 대응,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모든 선박을 파괴한다는 작전을 전개했다. 독일은 1917년 2월부터 무제한 잠수함전을 시행 했는데 독일 잠수함은 1916년 말 현재 134척에 이르는 대규모 부대였다.

당시 연합국 선박들은 독일의 잠수함 공격에 엄청난 손실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의 항구를 출항한 선박의 25%가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는 지경이었다. 물론 독일의 무차별 잠수함전 개시 이전인 1915년 5월 7일의 사건이었지만 독일 잠수함에 의한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의 격침은 궁극적으로 미국의 참전을 초래, 독일의 확실한 패망을 초래케 한 계기가 됐다. 1959명의 승객 중 1198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128명이 미국 국민이었다.

대륙국가이면서 동시에 해양국가가 되려는 모험

해군은 패권국의 필수적인 군사력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영국의 패권을 빼앗기 위해 해군력을 기른 후 도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독일이 해양과 대륙 모두를 제패할 수는 없었다. 독일의 무리한 전쟁 방식은 결국 미국의 개입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미국의 개입은 독일의 확실한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에 개입해 실제적인 세계 제1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의 지위에 올랐고 수십 년이 지난 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공식적으로 영국의 패권을 물려받았다.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이 된 후에도 대륙국가의 패권 도전 현상이 지속됐다. 소련은 1945년 이후 세계 패권을 놓고 미국과 경합했는데 그러기 위해 막강한 해군력을 건설했다. 문제는 소련역시 대륙국가인 동시에 해양국가가 되려고 시도했고 그것은 경제 파탄으로 귀결됐다는 점이다. 결국 소련은 패권의 꿈을 이루기는커녕 국가가 몰락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지금은 중국이 패권 도전자인데 역시 대륙국가라는 점에서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중이다. 중국의 해군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주변국들과 갈등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는 중이다. 중국이 대륙국가인 동시에 세계의 해양국가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만약 중국이 원하는 바가 이뤄진다면 그것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물론 미국은 해양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중국의 도전에 대응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처럼 해양에서의 승자가 패권을 지속적으로 거머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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