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으로 ‘조금만 더 가까이’
전쟁기념관으로 ‘조금만 더 가까이’
  • 이원우
  • 승인 2014.06.2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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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20년 … 신기술 접목해 볼거리 풍성
 

우리는 전쟁기념관을 잊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있다면 학창 시절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반 강제로 기념관을 향했던 기억뿐이다. 시기는 주로 2월. 새 학년 진학이나 졸업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공백이 생긴 커리큘럼을 채우는 것은 주로 견학이며 체험학습 같은 것들이다. 서울 인근의 학교들은 1년에 한 번쯤은 전쟁기념관에 들른다. 위치로 보나 명분으로 보나 이 만큼 적당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함께 넓은 기념관을 활보하며 공유된 기억을 쌓아가는 건 풋풋한 학창 시절의 한 장면으로 남는다. 하지만 학창 시절에 들른 적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졸업 이후의 전쟁기념관을 멀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아예 가본 적 없는 곳에는 궁금증이라도 생기지만 한 번 들른 적 있는 곳에 다시 들를 정성을 발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망각과 무관심의 뒤편에서도 전쟁기념관은 언제나 이태원 한복판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1994년 개관한 전쟁기념관은 지난 6월 10일 개관 20주년을 맞았다. 전쟁기념관은 이 20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갓난아기가 성인이 되는 20년의 시간 동안 놀라운 질적 성장을 이룩한 전쟁기념관을 심층 탐방해본다.

 

전쟁도 결국엔 ‘사람의 이야기’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은 국내 유일의 전쟁사 종합박물관이다. 11만5500m² 부지에 녹지와 연못, 분수대가 들어서 있어 전방위적인 문화휴식 공간으로도 점점 입지를 얻고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치러진 모든 전쟁을 아우르며 그 의미와 경과, 역사적 시사점을 탐구한다. 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6·25전쟁실I·II·III, 해외파병실, 국군발전실, 대형·방산장비실에 옥외전시장까지 둘러보면 두세 시간이 훌쩍 흘러있다.

중요한 건 전쟁이라는 민감한 소재에 임하는 전쟁기념관의 ‘관점’이다. 건강한 자유민주주의적 역사관의 토대 위에 굳건하게 서 있다. 싸우는 건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의 굴종적 혐전론이 발붙일 자리는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세련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그것이 바로 전쟁기념관 20년의 발자취라 할 수 있다.

관람료를 받지 않는 전쟁기념관의 2층 입구를 통과하면 시작은 추모(追慕)부터다. 조국(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는 호국추모실을 동선의 출발점에 배치함으로써 관람객들은 전쟁을 감정 없는 기계들의 충돌이 아닌 ‘사람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화랑정신, 태극기 등을 독창적 기법으로 그려낸 조형물 ‘동시성’과 ‘호국의 별’ 그리고 한 줄기 광선이 반구 중앙의 샘솟는 물과 만나는 조형물 ‘창조’ 등이 호국추모실의 볼거리다.

아무래도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선사시대의 전쟁사를 최대한 흥미롭게 구현하기 위해 애쓴 것은 전쟁역사실이다. 612년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1019년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을 디오라마 모형과 기록화로 표현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역시 1:2.5 비율로 구현해 놓은 것도 볼거리다. 분주하게 사진을 찍다보면 조금쯤 역사와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웬만한 역사교과서보다 건강한 관점의 6·25전쟁실

뭐니 뭐니 해도 전쟁기념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6·25전쟁 전시관들이다. 기념관 측은 6·25에 무려 3개의 전시실을 할애했다. 새로운 형태의 매체도 총동원됐다.

6·25전쟁을 표현한 영상이 파사드 기법으로 상영되고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을 바닥에 재현시킨 전사자 유해 발굴 상징존,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 1·4후퇴 등을 4D로 경험하는 체험관 등은 학생들에게도 큰 인기다.

6·25전쟁의 맥락과 전황을 설명하는 20여분의 영상만 봐도 웬만한 역사교과서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6·25를 이해할 수 있다. 6·25가 북침인지 남침인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군의 세력이 국회의원 배지까지 달고 있는 이 ‘난세’에도 전쟁기념관은 오히려 뚜렷한 역사관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개관 이래 전쟁기념관은 전시 콘텐츠 확보와 관람 서비스 개선, 교육프로그램 강화 등 ‘안보교육’의 장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이어왔다. 도슨트, 문화관광해설사, 전문 해설사 등 연인원 200여 명의 해설사를 운영하며 전시실 관람을 돕고 있다.

유치원, 초등생, 중고등학생, 교사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 또한 연중 운영한다. 초기엔 작은 규모로 시작됐지만 지금은 ‘박물관학교’ 등 24개 프로그램에 매년 교육 참가자는 2만 명 이상을 헤아린다.

2010년 시작된 재도약 … 가까이 더 가까이

학창 시절 이후 전쟁기념관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면 새로워진 기념관의 모습에 깜짝 놀라지 않을까. 4년 전부터 진행된 리뉴얼은 학창 시절의 기억마저 ‘리뉴얼’ 해놓을 기세다.

2010년부터 성인 기준 3000원의 관람료를 폐지하고 무료관람 정책을 실시하면서 전체 전시실을 대상으로 ‘전시 연출개선 사업’이 추진됐다.

2011년 국군발전실 재개관을 시작으로 2012년 6·25전쟁실 I·II, 호국추모실, 2013년 6·25전쟁실 III이 리모델링됐다. 단순한 설명 위주의 기념관에서 시각 청각 촉각이 전부 동원되는 복합전시관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지속적으로 펼친 기증유물 캠페인의 결과 2014년 1만3434점의 기증 유물을 간추려 기증실도 신설했다.

 

2012년에는 기념관 정문을 둘러싸고 있던 260m 길이의 담장을 허물어 앞마당을 개방하고 1만2000m² 규모의 시민공원을 조성했다. 리뉴얼 이전엔 연간 80만여 명이던 관람객 숫자는 2013년 개관 이래 최초로 연간 관람객 200만 명을 넘어섰다.

학생들과 군인들 이외에 외국인 관람객이 많이 보이는 이유는 단지 위치가 이태원 근방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20여 년간 기념관을 방문한 해외 국빈급 인사만 해도 스웨덴 국왕, 말레이시아 국왕, 덴마크 여왕 등 20여 명이다.

지난 4월 25일에는 오바마 미 대통령이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미군 전사자명비에서 추모행사를 갖기도 했다. 이외에도 현재 전쟁기념관에는 매년 30여 개국에서 3000명 이상의 외국 방문객이 방문하고 있다.

개관 20주년을 맞아 진행되는 행사도 다채롭다. 개관 2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청일·러일 전쟁과 위기에 선 대한제국’이 6월 10일부터 진행되고 있으며 27일에는 학술회의 ‘청일·러일 전쟁의 기억과 성찰’이 개최된다.

 

이외에도 기념관의 역사 20년을 조망할 수 있는 ‘전쟁기념관 역사실’을 신설하고 전국의 전쟁 군사박물관 및 기념관 네트워크 결성, 추억의 사진 공모전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진행 중이다. 올 하반기에는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체험형 전시관인 ‘어린이 박물관’이 3300여 m² 규모로 신설될 예정이라 20주년의 축제 분위기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서로가 반목하고 싸우는 전쟁을 우리가 ‘기념’하는 이유는 전쟁 그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다. 전쟁을 해서라도 지켜야만 할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있기에 그 본질을 기념하는 것이다. 20년의 세월을 관통하면서 전쟁기념관은 그 가치에 집중한 채 뚜렷한 역사관을 지켜내고 있다. 믿을 만한 역사책 하나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없는 이 시대, 전쟁기념관이 갖는 의미가 유독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우리는 전쟁기념관을 잊을 수 없다.

글·사진/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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