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수교 맺은 1989년은 기적의 해”
“한국과 수교 맺은 1989년은 기적의 해”
  • 김범수 편집인
  • 승인 2014.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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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버 가보르 헝가리 대사
 

1989년 동구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기적의 해’, 전(前) 공산국가 헝가리와 반공(反共)국가 대한민국은 이전까지 서로 관심이 없던 먼 나라와 외교관계를 전격 수립했다. 그 과정은 철저한 비밀작전이었다. 우리의 ‘북방외교’와 헝가리의 ‘동방외교’의 첫 만남이자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25년이 흘렀다. 양국은 이제 경제, 교육,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를 펼치고 있는 우방이 됐다. 6월초 처버 가보르 주한 헝가리 대사를 만나 양국관계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들어봤다.

- 지난달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마이클 커비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위원장 초청 간담회에 오셨었죠. 한국정부와 동시에 북한정부로부터 아그레망을 받은 헝가리 대사로서 부담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북한의 인권문제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북한인권 문제는 한반도 문제가 아닌 국제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통일된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것은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자 바람이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큰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커비 위원장의 방문행사는 북한인권 문제를 배우고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고무적이었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교 25주년, 동구권 최초로 외교관계 수립

- 올해는 한국과 헝가리가 외교관계를 수립한 지 2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헝가리는 한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한 첫 번째 동구권 국가이기도 한데요. 그동안 양국관계의 성과를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과 수교를 맺은 1989년은 ‘기적의 해’로 불리는 해입니다.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된 해이죠. 바로 이런 ‘기적’ 덕분에 아무런 관계도 없던 상태에서 아시아의 반공국가와 유럽의 전 공산국가가 정상수교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헝가리는 공산국가이긴 했지만 1956년 혁명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1960년대부터 헝가리 국민 삶의 질이 다른 동구 공산권보다 높아졌고 서구의 영향을 주변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불어넣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동구권개방정책’(Eastern Opening Policy)이라고 불리는 외교정책을 수립해 무게 있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외교수립 25주년인 올해 하반기와 내년 초에는 헝가리 대통령과 총리가 방한할 예정입니다. 이렇듯 헝가리는 각계 고위층의 공식 방문 등을 통해 경제, 문화, 인적외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사이버정책, 수로·수자원 정책, 테러리즘 등 다양한 국제이슈를 망라하는 교류와 협력을 공고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중에서 비즈니스와 고등교육은 헝가리가 헝-한 관계에서 가장 주력시하는 부문입니다. 현재 헝가리에 삼성과 한국타이어를 비롯한 50여개의 한국기업이 있습니다. 특히 삼성은 1989년 외교수립과 동시에 가장 먼저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기업입니다.

- 헝가리가 많은 한국 기업들에게 매력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또한 방금 언급한 교육분야의 협력에 대해서도 궁금한데 좀 더 설명을 해주시죠.

헝가리가 유럽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비교적 우수한 인프라와 독일과 프랑스의 가격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질 좋은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해외 기업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봅니다. 한국기업들이 헝가리 시장 진출 초반에 고전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현재는 매우 만족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이는 헝가리의 경제 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2.7%의 GDP 성장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교육협력과 관련해서는 고등교육과 리서치(R&D) 부문에서 한국의 대학들과 다양한 교류를 맺고 있습니다. 기초 연구에 강한 헝가리 인재들과 대중화에 능한 한국인재들과 공동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헝가리의 각 대학에는 250여명의 한국 유학생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헝가리의 교육수준은 매우 높은 편입니다.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그리스, 독일, 이스라엘 등 각국에서 유학생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자원부족국가이기 때문에 인적 자원에 활발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성냥, 헬리콥터, 볼펜, 무소음 냉장고, 콘택트 렌즈, 루빅큐브 등이 헝가리 교육 모토인 ‘열심히 일하고 답을 찾아내는 헝가리인’의 산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학생들에게 교육을 기회를 더 열고 싶습니다.

- 헝가리 하면 떠오르는 게 프란츠 리스트 등 피아니스트와 음악들이기도 합니다. 양국간 문화 교류도 이뤄지고 있나요.

헝가리는 중유럽의 문화 대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제의 나라이자 미식가의 나라죠. 헝-한 외교 25주년을 기념해 재헝가리 헝-한 친선협회가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 헝가리의 전통악기인 심발롬을 기증했습니다. 한국의 양금과 비슷한 악기입니다. 지난 5월 1일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이 있었습니다. 6월 19일에는 수원화성국제음악제에 헝가리교향악단이 참가합니다. 예술적인 민족이라는 점에서 한국과 헝가리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올해 헝가리에 총선이 있었지요. 여당이 승리를 한 것으로 아는데 현 정부의 성격과 방향성에 대해 설명 바랍니다.

현 정부와 여당은 4년 전 큰 차이로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의석의 2/3를 차지했죠. 그리고 올해도 역시 큰 차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헝가리 정부는 유럽에 치중됐던 경제활동을 아시아로 분할하고자 합니다. 또 수출증가를 통해 전화위복을 꾀하면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2.7% GDP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서구 중심에서 벗어나 아시아를 아우르는 새로운 외교와 무역, 경제의 ‘판’을 짜고 있습니다.

- 헝가리 여당 이름이 ‘젊은민주연합(Alliance of Young Democrats)’입니다. 당명앞에 ‘젊은’이라는 이름이 흥미로운데요, 연유가 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1980년대 말 처음 당이 설립될 때 구성원들은 20-30대 중반의 청년들이었습니다. 당시 만 25세였던 당 리더는 3번이나 총리직을 역임한 현 헝가리 총리이고 이제는 50대가 됐습니다. 당을 이끌었던 당원들도 대부분 50대가 됐습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젊음을 보냈기 때문에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웃음)

 

탈공산화된 후 정치·경제 수준 높아져

- 대사님도 공산주의 시대를 경험하셨지요. 당시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그리고 체제변화를 직접 겪은 소감을 말해주신다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었다고 할 만큼 오래된 이야기라서 다행입니다.(웃음) 헝가리는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성취를 이끌어냈습니다. 탈공산화된 지 25년 됐고 정상적인 민주주의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해외자본의 투자를 받아 높은 성장을 만들었습니다. ‘크렘린 궁’의 변화를 일찍 감지하고 탈공산주의 첫차를 탄 헝가리는 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가입한 NATO가 헝가리의 탈공산주의에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004년 EU 가입은 긍정적인 기록이었습니다.

1989년 이전 중동부유럽을 방문한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전 동유럽이 ‘회색’으로 칠해진 땅으로 묘사됐다면 지금은 역동적이고 밝은 색으로 바뀌었습니다. 공산주의 시대는 분명 어둡고 힘든 시간이었고 특히 특정 연령대에게 더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생각과 정서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1989년 체제 변화가 일어날 때 사람들은 적어도 10년 안에 우리도 오스트리아, 독일처럼 곧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물론 예상보다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확실히 헝가리는 바뀌었습니다.

- 소위 ‘회색시대’로부터 변화를 겪으면서 짧은 시간 동안 거쳐야 했던 역사의 순간들을 헝가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가르치는지 궁금합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경우 아직 과거 일본 식민지 시대의 기억을 안고 있습니다.

헝가리 교육, 교과과정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당연히 변화를 거쳐야 했습니다. 새롭게 발견되는 물리, 화학 같은 분야의 과목들에 대해서도 기술해야 했고 체제와 정치 같은 과목들 또한 언급해야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역사 과목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교과서는 새롭게 제작됐고 공산주의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부분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전까지의 교과서는 마르크스 중심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유대계 헝가리인들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이런 부분은 수정됐습니다. 1944년 2차 세계대전 말 홀로코스트에 가담해 유태계를 핍박했던 명백히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물결은 지난 50년 안에 생겨난 전 세계의 홀로코스트역사추모박물관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헝가리인으로서, 헝가리 국민으로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그들은 지금 새로운 ‘유대인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현재 헝가리 내 많은 축제들이 유대인들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반유대주의자들이 존재하기는 합니다만, 유대인비하발언 등을 하면 처벌을 받는 등의 법을 만들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대사님 개인에 대한 소개를 바랍니다. 한국에 오신 지 아직 1년이 안 되셨죠.

한국은 아시아의 첫 부임지입니다. 작년 9월에 대사로 발령을 받고 왔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근무했습니다. 저는 원래는 ‘미국통’입니다. 미국 유학 당시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워싱턴DC에서 정책 애널리스트로 근무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코소보 사태 등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습니다. 헝가리 외교부에 근무한 지는 19년 됐습니다.

- 북한 대사직도 겸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북한과 관련된 일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1년에 1∼2회 북한을 방문합니다. 북한 주민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헝가리 침례교단에서 북한 주민 지원을 위해 의료품을 비롯한 여러 생활 물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업을 보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김범수 발행인 www.kimbumsoo.net
정리/김경은 인턴기자 wenisekim@gmail.com
사진/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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