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4.07.0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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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7일 서울 신촌 일대에서는 동성애문화 축제로 알려진 퀴어문화축제(Korea Queer Festival)가 개최됐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국가적 애도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이 행사에는 국내외의 많은 동성애자들과 일반인들이 참여해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일부 남성 참가자들은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속옷만을 걸친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고 신발 끈을 묶기 위해 몸을 숙일 때에는 숨겨야 마땅한 신체 일부의 모습도 선명하게 목격될 수 있었다.

행사 주최 측은 다양한 전시와 이벤트를 위한 부스를 마련해 놓고 성병 검사 및 무료 콘돔을 배포하고 있었으며 미국, 독일, 프랑스 대사관에서도 부스를 설치해 동성애문화 확산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눈에 띄는 부스가 있었는데 바로 한국 성공회와 섬돌향린교회 등이 설치한 기독교 단체들의 부스였다. ‘퀴어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현수막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팻말을 내걸고 축복송과 예배 찬양 등을 부르며 동성애자들을 축복하는 소규모 집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번 퀴어문화축제의 표어는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였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은 곧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동성애자를 사랑한다면 동성애도 인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왜곡된 하나님의 메시지

그러나 이 같은 메시지는 사랑의 의미를 완전히 제멋대로 왜곡한 거짓된 메시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의 강령을 다음 두 계명으로 요약해 주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마22:37-39)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우선 되는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음란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불의를 사랑하고 탐욕을 사랑할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내 아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다른 여인을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죄에 대한 사랑’은 공존할 수가 없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죄에 대한 혐오’로 나타나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혐오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닌 일치하는 개념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음란과 탐욕을 혐오하게 돼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거짓과 불의에 분노하게 돼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죄에 대한 분노는 죄인에 대한 분노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있는 죄인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돼 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죄에 대한 분노로 나타나고, 죄에 대한 분노는 죄인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요,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낌없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쏟으신 이유다. 그토록 인간의 죄를 혐오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토록 죄로 고통 받고 있는 인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연히 동성애자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동성애를 혐오하신다. 동성애가 동성애자들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라는 퀴어문화축제의 표어는 이 같은 성경적인 사랑의 정의를 완전히 왜곡해 마치 동성애에 반대하는 자들이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짓밟고 있는 가해자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과 세계관 그리고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전술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용어전술’이다. 언어는 생각을 바꾸고, 생각은 행동을 바꾸기 때문에 언어가 타락하면 생각이 타락하고, 생각이 타락하면 행동이 타락하게 돼 있다. 그래서 특정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돼 있다. 오늘날 전술적으로 가장 남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인권’이란 단어다.

동성애가 인권이 아닌 이유

세상이 말하는 인권이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중심에 두고 있는 인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권의 진정한 의미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권리란 것은 미국독립선언문(1776)이 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창조주로부터 양도받은 권리’다. 즉,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권리란 것은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권리가 아니라 창조주가 인간에게 부여한, 허용한 범위 내에서 누릴 수 있는 제한적인 권리인 것이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동성애가 인권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동성애자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차별적인 대우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도 ‘존귀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특권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길거리에서 엉덩이를 훤히 드러내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그리고 눈을 가린 채 그 곁을 움츠리고 지나가는 한 아이의 모습 속에서, 오늘날 인권이란 개념이 얼마나 남용되고 있는지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이태희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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