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친구가 되기엔 너무 먼 당신
중국, 친구가 되기엔 너무 먼 당신
  • 정용승
  • 승인 2014.08.01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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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항상 빠지지 않는 문구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다. 이 문구는 일본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스포츠 경기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일견 맞는 말이다. 일본 치하에서 겪었던 식민지 시절을 잊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이 문구가 일본에게만 ‘일방통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 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일본에게 향하는 ‘전용’ 문구가 됐을까. 침략사로 점철된 한반도의 역사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단연코 가장 큰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일제 식민지와 임진왜란이라는 기억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지만 이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침략과 굴욕은 중국으로부터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침략이 있었을까. 대한민국 직전의 조선으로만 돌아가도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의 역사와 만나게 된다.

삼전도의 굴욕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9년 차의 시간을 두고 있지만 원인은 같다. ‘명나라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고수했다. 즉 신하국가인 조선이 어버이국가인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 정책을 유지했고 왜와 여진족에 대해서는 강경과 회유책을 동시에 사용하는 ‘교린’ 정책을 기본으로 여겼다. 조선의 사대교린정책은 임진왜란(1592)때까지 어느 정도 통했지만 임진왜란이 마무리 될 무렵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여진족의 확장과 더불어 명나라의 쇠퇴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광해군은 여진족과 명나라의 다툼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취한다. 명나라와 여진족 어느 편도 딱히 들지 않는 자세를 선택한 것이다. 임진왜란의 피해가 아직 남아 있었고 명나라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만한 군사도 없었다. 또 여진족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기 때문에 섣불리 나섰다가는 조선도 여진족에 된통 당할 판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이런 태도를 대신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버이나라를 돕지 않는 것은 배은망덕이라 여겼고 조선의 신념을 저버리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신들은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광해군을 축출하는 인조반정(1623)을 일으켰다.

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는 1616년(광해군 8년) 칸(汗)이 돼 후금을 세우고 스스로를 황자라 일컬었다. 1621년 후금은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도읍을 심양으로 옮겼다. 후금은 이렇게 동아시아의 맹주가 됐고 스스로를 황자라 칭하는 누르하치는 조선에게 사대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후금의 제의를 무시했다. 이에 격분한 후금은 인조반정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한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침공 2달이 지난 후 후금은 먼저 화의를 제안했고 조선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형제의 맹약’이었고 후금과 조선은 형제국가가 됐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명을 제외한 다른 나라를 황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명을 배신하는 일이었고 강상의 윤리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오히려 조선은 청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였다. 청에서 온 장수를 오랑캐 종자로 취급해 망신을 주었고 그들이 가져온 청나라 왕의 글을 감히 조선의 국왕에게 올릴 수 없다며 개봉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몇 번 일어나자 청나라는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해 45일 동안 항전했으나 결국 청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했다. 3배 9고두례를 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조는 소현세자, 그리고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과 마오쩌둥

국토 분열의 아픔, 6·25

조선이 사라진 지금 청의 침략은 그저 역사책에서만 존재하는 과거의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대사에서도 중국이 남긴 흔적은 발견된다. 여전히 생채기가 벌어져 있는 상처, 6·25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의 아픔이다. 북한은 아직도 핵으로 남한을 위협하고 있고 갈라진 땅은 남한을 ‘섬’처럼 만들었다.

스탈린은 한반도를 공산주의화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계획에 동력을 제공했다. 중국은 1950년 5월 김일성의 한국전 발발 계획에 동의를 했다. 그렇게 1950년 6월 25일 중국과 북한과 소련은 허리가 끊긴 지금의 한국을 만들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마오쩌둥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이 선포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요한 명분이 됐다. 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는 중국입장에서는 한국전쟁은 자신들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복잡한 정치상황을 전쟁으로 돌림으로써 내부 결속을 할 수 있었고 소련을 지원함으로써 소련과의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중국은 아직도 자신들이 개입했던 10월 25일을 ‘항미원조’ 전쟁으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내전으로서의 ‘조선전쟁’으로 규정한다.

중국 정부 당국자는 2010년 제3국과의 대화에서 “한국은 미국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손봤을 나라”라고 언급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또한 “서해에는 공해가 없다”는 말로 서해를 중국의 내해로 보는 시각을 비치기도 했다. 이런 중국의 입장은 아직도 중국 내에 남아 있는 중화사상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거론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페이지는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정용승 기자 jeong_f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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