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내란 음모’는 있었다
그때도 ‘내란 음모’는 있었다
  • 정용승
  • 승인 2014.08.2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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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 50주년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이란 언제부터를 가리키는 단어일까. 국어사전은 ‘요즘’을 ‘바로 얼마 전부터 이제까지를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 얼마 전은 언제일까. 혹시 이 말의 주인공인 안철수 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에게 물어보면 답을 알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요즘 세상’에도 북한의 체취는 물씬 풍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쟁 이후 좌우분열이 극심했던 50여년 전의 상황은 더 심각했을 수밖에 없다. 잠시만 그때로 시간을 돌려보자. ‘통일혁명당(통혁당)’이라는 엄청난 조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2014년 8월 24일은 중앙정보부가 ‘통일혁명당 지하 간첩단 사건’ 수사를 발표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4년 3월 평소 북한을 동경해 오던 김종태는 남파간첩인 김수상(일명 김송무)의 포섭에 넘어가 전라남도 신안군에 위치한 임자도를 통해 월북해 조선노동당에 입당한다. 북한에서 공산주의 사상교육과 간첩활동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한 김종태는 자주 북한을 왕래했다. 그리고 ‘지하당 구축’ 지시를 받고 돌아와 1965년 11월 서대문구 소재 자택에서 김질락, 이문규 등과 함께 정식으로 ‘통혁당’을 결성해 김종태 자신이 당수로 올라선다.

통혁당 사건 공판 모습(1968년 11월28일)

남한에 위치한 북한의 전위조직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남한에 북한의 전위조직인 통혁당이 결성된 것이다. 통혁당은 결성 배경이나 활동 과정이 철저히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전형적인 북한의 대남 전위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수인 김종태가 167회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밝혀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에서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공작원으로 활동하다 1976년 9월 귀순한 김용규의 증언을 들어보자.

“통혁당은 1961년 12월 임자도에서 면장을 지냈던 지방 유지 최영도가 생질인 남파 공작원 김수영에게 포섭되면서 시작됐다. (…)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조카인 김수상을 내세워 김종태를 포섭하기로 했다. (…) 김종태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북쪽과 선을 닿게 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포섭이 쉽게 이뤄졌다. 평양으로 밀입북한 김종태는 간첩교육을 받는 한편 김일성과 만나기도 했다.” (‘진보의 그늘’ 한기홍 著)

이렇게 조직된 통혁당은 1968년 8월 수사당국에 적발될 때까지 활동했다. 그들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통혁당 창당 선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반미·반정부·북한체제 찬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문구는 △통일혁명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현 시대와 우리 조국 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임 △당의 최고 목적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며, 당면적인 사회제도를 전복하고 인민민주주의 제도를 건립하며 나아가 국토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는 것임 등이다. 명확히 주체사상을 따르며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통혁당은 확실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활동도 조직적,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김종태를 당수로 한 지하지도부는 ‘조국해방전선’과 ‘민족해방전선’ 그리고 당 기관지인 ‘청맥’ 등으로 구성됐다. 김질락이 책임비서를 맡은 민족해방전선은 하위 6개 분과위로 구성된 ‘새문화연구회’와 7개 서클로 구성된 단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문규가 책임비서를 맡은 조국해방전선은 통혁당의 아지트로도 사용된 학사주점을 관리했다.

또 청맥지는 김진환이 편집책임자를 맡았다. 청맥지는 청년과 지식인에게 반미·반정부 사상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았다. 이 불법적인 지하조직은 북한의 금전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움직일 수 있었고 구체적인 임무와 지령을 받아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통혁당은 게릴라식 무장투쟁으로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고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농촌에서는 테러투쟁으로, 도시에서는 폭발물을 이용해 주요 시설을 폭파해 혼란을 가져오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아직도 활동하는 ‘그때 그 사람들’

통혁당의 조직도를 살펴보다 보면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신영복’과 ‘박성준’이다. 신영복은 김질락 민족해방전선 책임비서와 함께 새문화연구회와 7개의 서클을 운영했던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 출신이다. 그는 통혁당 사건과 연루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했다.

옥중에서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이른바 ‘권장도서’가 됐으며 출소 이후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소주 ‘처음처럼’과 문재인 대선 후보의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의 글씨를 쓴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과거 좌익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의 사상체계를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과연 그가 올바른 전향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신 교수는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전국교수 1000인 성명’과 2006년 ‘6·15공동선언-10·4선언 이행 및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각계 인사 공동선언’ 등에 참여해 국보법 폐지와 6·15 및 10·4선언 이행 촉구에 앞장서왔기 때문이다.

또한 2006년 신 교수는 정년퇴임 당시 교단을 떠나는 자리에서 “진보적 학풍의 성공회대였기 때문에 좌파 색깔이 확실한 나 같은 사람이 안정적으로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성준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배우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또한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상임이사로 있었던 ‘아름다운 가게’의 대표를 맡기도 했던 그는 대학 선배였던 신영복으로부터 포섭돼 사상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통혁당 사건으로 1968년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1968년 8월 사법당국에 적발되기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며 남한 정부의 전복을 노렸던 통혁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조직은 사라졌어도 사건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활동 중이다. ‘진보’와 ‘민주’의 이름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들은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 해산청구를 둘러싼 일련의 논쟁을 과연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정용승 기자 jeong_f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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