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숫자 천재’들의 대축제 세계수학자대회에 가다
[르포] ‘숫자 천재’들의 대축제 세계수학자대회에 가다
  • 이원우
  • 승인 2014.09.0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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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차 세계수학자대회 역대 최대 규모로 서울서 개최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Jules Henri Poincare)는 평생을 매달린 가장 어려운 수학 문제를 버스에 타는 순간에 풀었다. 버스 계단에 발을 올려놓는 바로 그 순간에 해답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된 대화’를 계속 하고 있었다고 스스로를 표현했던 그는 해답을 찾은 순간에 ‘완벽한 확실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소셜 애니멀’ 데이비드 브룩스)

수학자(mathematician)만큼 ‘괴짜’의 이미지를 영속적으로 달고 다니는 존재들이 또 있을까.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우리는 자연히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과 책에 파묻힌 공부벌레의 모습을 떠올린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스피노자가 철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표상한다면 수학자들은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리만 가설과 가우스와 피타고라스에 천착하고 있을 것만 같다.

   
   
세계수학자대회 개막식

120년의 역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

하지만 4년에 한 번, 세상의 모든 수학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목하는 ‘축제’가 있다. 축구선수들에게 월드컵이 있다면 수학자들에게는 세계수학자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가 있는 것이다.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손꼽히는 필즈상(Fields Medal)의 시상식을 겸함으로써 더 주목을 받는 이 대회는 올해 마침내 대한민국에서 그 화려한 스물일곱 번째 막을 올렸다. 8월 13일 개막해 21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진행되는 세계수학자대회의 개막식 풍경과 대회의 전모를 살펴보자.

세계수학자대회의 역사는 18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19세기 수학의 ‘황금기’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 데이비드 힐베르트, 샤를 에르미트, 펠릭스 클라인, 막스 뇌터 등 45명의 수학자들이 시카고 대학에서 세계수학대회(International Mathematical Congress)를 개최한 것이 대회의 태동이다. 펠릭스 클라인은 이 대회의 개회사를 통해 수학자들의 국제적인 연합과 지속적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결국 1897년, 제1차 세계수학자대회(ICM)가 189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최됐다.

1차 대회에는 16개국 208명의 수학자가 참가했다. 이 중에서 여성은 4명에 불과했지만 수학자들 간의 연합전선을 형성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충분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차 대회의 조직위원장은 ‘버스에서 문제를 풀어냈던’ 앙리 푸앵카레. 기조강연을 맡은 데이비드 힐베르트는 ‘20세기에 해결해야 할 23개의 수학난제’를 제시하며 전 세계 수학자들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이후 3차 대회가 독일 하이델베르그, 4차 대회가 이탈리아 로마, 5차 대회가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이어지며 유럽에서의 지평을 넓혀갔다. 6차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회에서 잠시 침체기를 맞은 이 행사의 위상이 한 차례 올라간 것은 1924년에 열린 7차 캐나다 토론토 대회 때부터였다.

28개국 444명의 수학자가 참가한 이때 세계수학자대회 총회 측은 ‘새로운 업적을 이룬 수학자들에게 금메달을 수여’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당시 토론토대학의 수학과 교수였던 존 찰스 필즈(J.C. Fields)가 자금을 기부하기로 결정하면서 상의 명칭은 자연히 필즈상(Fields Medal)이 됐다. 첫 메달은 1936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10차 대회에서 제시 더글러스와 라스 아포르스가 차지했다.

노벨수학상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필즈상은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고 있기도 하다. 노벨상처럼 매년 발표하는 것이 아닌 만큼 한꺼번에 4명 이내의 수상자를 발표하는 것이 관례다. 여기에 수상 당시 연령이 40세를 초과할 수 없다는 제약이 덧붙여지면 ‘노벨상보다 더 까다로운 게 필즈상 수상’이라는 성토(?)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25개국 5,000여명 … 한자리에

나이 제한이 생긴 이유는 ‘미래’의 수학 발전에 크게 공헌할 수학자에게 금메달이 수여되기를 바랐던 창립자 필즈의 소망 때문이다. 물론 이 까다로운 제약은 상의 권위를 더 높여놓았다. 필즈상은 세계수학자대회 개최국의 국가원수가 수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할 정도로 전 세계적인 권위를 획득하고 있다.

필즈상 제정 이후 세계수학자대회는 다시 한 번 공백기를 맞는다. 2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오슬로 대회 이후 14년의 휴식을 맞은 세계수학자대회는 195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11차 대회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10차 대회의 3배수에 해당하는 40개국 1700여명의 수학자가 참석한 이 대회는 세계수학자대회의 ‘황금기’를 열었던 시발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2010년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열린 26차 대회가 아시아로서는 3번째의 세계수학자대회였고, 다음 차례가 바로 2014년 대한민국이다. 1981년 국제수학연맹(IMU)에 가장 낮은 등급으로 가입한 이래 33년 만에 주최국이 된 셈이다.

125개국에서 5,000여명이 참가한 이번 대회는 지금껏 개최된 그 어느 대회보다도 스케일이 큰 행사로 손꼽히고 있다. 대회는 필즈상 등 주요상 수상강연(10회), 국내외 수학자들의 기조강연(21회), 초청강연(179회) 등으로 다채롭게 채워졌다. 신진 수학자들의 일반 학술논문 1182개가 발표되는 것 또한 학술계의 관심사다. 황준묵 고등과학원 교수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회 기조강연을 맡게 된 것 또한 커다란 성과로 지목된다. 필즈상 수상자 대다수는 상을 받기 전 기조강연자로 대회 연단에 오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마리암 미르자카니 교수에게 필즈상을 수여하는 박근혜 대통령

대회 개최자-시상자-수상자 모두 ‘여성’

지난 13일 오전 9시경 화려하게 막을 올린 세계수학자대회 개막식 행사의 스포트라이트는 당연히 ‘필즈상 수상자’에게 집중됐다.

개막식 이전까지 수상자를 밝히지 않는 관례 때문에 더 긴장감을 고조시킨 이번 필즈상의 금메달 4개는 아르투르 아빌라(35)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석학연구원, 만줄 바르가바(40) 미국 프린스턴대 석좌교수, 마틴 헤어러(38) 영국 워릭대 교수, 마리암 미르자카니(37)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에게 돌아갔다. 수상자에게는 메달과 함께 1만5000 캐나다 달러(약 14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됐다.

필즈상 수상자 4인 중에서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은 것은 마리암 미르자카니 교수였다. 그녀는 1936년부터 시작돼 56명에 이르는 필즈상 수상자들의 목록에서 ‘최초의 여성 수상자’라는 기록을 보유하게 됐다.

관례에 따라 개막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미르자카니 교수에게 상을 수여하는 순간 행사장에 참석한 전 세계 모든 언론사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필즈상 역사상 첫 수상자에게 메달을 수여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계수학자대회의 개최자라고 볼 수 있는 잉그리드 도비시 국제수학연맹(IMU) 회장까지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개최자와 필즈상 시상자, 수상자가 전부 ‘여성’인 진풍경이 연출됐다. 이탈리아에서 대회에 참석한 한 학자는 “필즈상에도 능력과 실력에 의한 여풍이 시작된 것”이라고 논평했다.

이란에서 태어나 이란에서 대학을 졸업한 미르자카니 교수의 수상 소감은 의외로 겸손(?)했다. 그녀는 “나 역시 수학을 못 한다는 자괴감에 빠지면서 수학을 싫어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한편 미르자카니 교수가 언급한 수학올림피아드는 13명의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한 ‘수학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한국 학생들 역시 좋은 성과를 올리는 대회라 언론의 주목도 자주 받는다(2012년 6명 전원 입상). 어린 시절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입상할 정도로 막강한 실력을 자랑하는 한국 학생들을 ‘필즈상 수상자’로 길러내기 위해서 어떤 점들이 필요한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다른 수상자 3인의 이력도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인도 출신의 수상자 만줄 바르가바 미국 프린스턴대 석좌교수는 수학문제 해결을 ‘예술’에 비유하며 눈길을 끌었다. 실제로 한때 북인도의 대표적인 타악기인 타블라 연주자를 꿈꿨던 그는 부모가 모두 수학자였던 덕에 더 수학에 친숙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는 “학교에서 지루한 수학 수업을 듣고 와도 집에서 흥미진진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자신의 환경에 감사했다. “슈퍼마켓에 쌓여 있는 오렌지들이 피라미드 형태인 것을 보면서 호기심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역시 일상의 호기심을 학문적 성과로까지 성공적으로 연결시킨 케이스다.

아르투르 아빌라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석학연구원은 북미나 유럽 등 수학 선진국이 아닌 브라질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첫 필즈상 수상자로 눈길을 끌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브라질의 연구기관인 순수응용수학원(IMPA)에 들어가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파격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이번 수상은 ‘브라질 교육의 쾌거’로까지 표현되고 있으며 역시 한국교육에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마틴 헤어러 영국 워릭대 교수는 조국 오스트리아에 첫 번째 필즈상을 안긴 수상자로 기록을 남겼다. 역시 아버지에 이은 ‘모태 수학자’인 그는 요리를 하거나 음악을 들을 때조차 수학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필즈상 수상자 기자회견

한국의 ‘용두사미’ 언제쯤 사라질까

여성 수상자가 배출되고 이른바 약소국 출신에서도 필즈상 수상자가 배출되는 풍경은 한국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인들은 언제쯤 자국 출신의 필즈상 수상자를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단순한 국수주의적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한국 학생들이 거두는 성과를 봐도 그렇지만 2012년 기준 OECD 수학분야 학업성취도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 수학분야 논문 숫자 또한 세계 11위에 올라 있는 한국이 어째서 세계수학자대회에서만큼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걸까.

많은 전문가들은 수학 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부족하다는 점을 아쉬움으로 지적한다. 최근 미래창조과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16조9139억원 중 수학분야 투자액은 673억원에 불과하다. 이는 고작 0.4%에 불과한 비율로 전년도와 비교할 때 물가상승률조차 보전 받지 못한 금액이다. 정보통신분야에 투입된 1조6965억원에 비교해도 3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많은 수학전문가들의 탄식을 자아내고 있다.

물론 R&D 예산을 투입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수학을 중시하는 ‘분위기’ 또한 중요하다. 여전히 이과 계열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대 진학이 ‘대세’다. 2012년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입상한 6명의 학생들 중에서도 2명만 서울대 수리과학부에 진학했을 뿐 절반에 해당하는 3명은 의대로 진학했다(1명은 고교 재학 중). 진로를 정하는 부분에 타인이 개입할 여지는 없겠지만 여전히 의대로 인재가 몰리는 상황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대회 환영사에서 “수학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학문이자 전 인류가 공유하는 위대한 유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대회가 폭넓고 깊이 있는 논의로 수학의 학문적 지평을 확대하고 인류 문명 발전에 이바지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대통령 후보 시절엔 “과학이 국정운영의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까지 밝혔던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수학계의 축제인 세계수학자대회 개막식에서 어떤 풍경을 보았을까. 이 축제를 또 다시 한국에서 주관할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이제 세계수학자대회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한국인 수상자를 배출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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