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식 학교 모델 ‘혁신학교’는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
전교조식 학교 모델 ‘혁신학교’는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
  • 미래한국
  • 승인 2014.09.02 2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정욱 편집위원 외부 기고

적은 지면(紙面)과 짧은 지식으로 교육을, 그것도 대한민국 교육을 논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가당찮은 일이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육의 한쪽 면은 분명 학벌사회, 성공중심사회와의 지겹고, 오래되고, 견고한 고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육만 바꿔서 될 일이 아니고 제대로 하자면 세상을 다 바꿔야 하는데 그리 쉬운 일이라면 이렇게 지지부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펼치는 것은 대한민국 교육이 과열, 왜곡 현상을 넘어 이제 퇴행적인 모습까지 보이는 총체적 난국으로 접어들었다는 느낌 때문이다.

최근 좌파 교육감들의 약진과 함께 화두로 떠오른 것이 자사고 폐지, 혁신학교 강화다. 자사고는 교육 소비자들의 수월성 교육(엘리트 교육)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이명박 정부 시절 도입된 학교 모델이다.

2010년 25곳이 생겼고 2011년에 22개, 2013년에 1개가 추가되어 현재 전국에 49개 학교가 있다. 이걸 폐지하겠다는 이유는 자사고가 일반 학교를 망치는 주범이기 때문이란다. 전체 고등학교의 2.2%에 불과한 자사고가 일반고를 황폐화시키고 있다고? 이 논리는 서울대가 있기 때문에 나머지 대학이 망가지고 있다는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그보다 훨씬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사고에도 평균에 한참 미달인 학생이 수두룩하고 일반고에도 명문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실력 있는 학생이 역시 수두룩하다. 더 웃기는 건 좌파 교육감들이 진짜 엘리트 교육 학교 모델인 특목고 존립에는 유보적인 입장이라는 사실이다.

자기네 자식을 보내야 하니 그러는 모양인데 한마디로 앞뒤가 안 맞는다. 특목고, 외고에 좌파 교육감들의 자녀들이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경우는 이미 많이 보도되었으니 생략한다. 내가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른바 혁신학교다.

좌익들의 프레임은 항상 달콤하다. 전교조가 처음 등장할 때 참교육의 당의정으로 촌지 근절 따위를 내세워 국민들의 판단력을 흐려놓았던 것처럼. 혁신학교는 2009년 김상곤의 경기도 장악과 함께 시작된 전교조식 학교 모델이다. 세 가지를 내 걸고 있다.

입시와 경쟁보다는 함께 배우는 교육ㆍ교사와 학생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학교(교장은 배제다)ㆍ교사, 학생이 소통하고 협력하는 학교 문화다. 학부모들이 혹하기 십상이다. 이는 이번에 좌파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었을 때 학부모 한 분이 “당분간 우리 아이들이 입시 경쟁에는 좀 덜 시달리겠네.”라고 소감을 말한 것의 정서적 연장선상에 있다.

얼핏 멋지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혁신학교는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이며 대단히 반동적인 발상이다. 전교조가 한동안 획책했던, 계기 수업을 통한 교실의 적색화보다 장기적으로는 아이들에게 더 해악이 크다. 혁신학교 스타일일 경우 교사와 학생이 의견을 교환하여 교육 내용을 함께 결정한다. 어떤 게 나올까. 입시와 경쟁을 즐기는 학생은 별로 없다.

과도한 공부나 전문적인 기술 교육을 원하는 학생도 거의 없을 것이다. 당장의 고달픔을 면하고자하는 일차원적인 욕구를 일순위로 드러낼 것이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인가요, 행복이 성적순인가요 같은 철 지난 소리를 해 대면서. 그럴 때 교사는 학창 시절은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이며 고통을 동반하는 시기라며 인내심을 길러주는 쪽으로 교육의 방향을 설정해야 맞다.

그런데 혁신학교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고 경쟁 대신에 공동체를 함께 구현하자며 팔 걷어붙이고 나설 확률이 높다(하긴 전교조는 예전부터 학생들을 ‘동지’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조직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교사가 교사의 지위를 망각하는 것이고 학교의 존립 이유를 뿌리부터 허무는 짓이다. 현대 교육은 민주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고 그것은 법치 교육과 기술 교육으로 나타난다.

소통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생과 교사가 동등한 위치에서 소통하면, 그래서 끌어주고 따라가는 관계가 허물어지면 그 자리에 필연적으로 끼어드는 것은 인성 교육이다. 인성 교육이라. 뉘앙스 상으로는 대단히 아름답다.

그러나 인성 교육처럼 한국 사회에서 잘 못 쓰이고 있는 단어도 드물다. 인성 교육은 전통적으로 리더를 위한 교육이며 주자학적 유교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단어다. 유교 교육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질서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슬로건은 “경제적 이익을 경시하라.” 이다. 무슨 말이냐.

도덕을 장악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농공상을 낮춘 끝에 무력화시켜 신분·계급적 질서를 유지하는 게 그 목적이라는 얘기다. 이때 지배계급이 배우고 익히는 게 인성 교육이다. 사극에서 흔치 등장하는, 신하들이 왕에게 덕치를 베푸소서 고할 때의 그 덕이 바로 인성 교육이다.

반면 현대의 민주적 평등사회는 법치를 기반으로 자신이 가진 기술로 타인과 재화나 용역과 교환할 수 있도록 짜여진 사회다. 인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법치 준수와 능동적 경제 활동을 전제로 이루어져야지 그 둘을 무시하고 앞서서는 안 된다.

혁신학교는 경쟁을 왜곡시킨다. 마치 친구를 밟고 넘어가야 하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학생들의 경쟁 상대는 옆 반의 아무개가 아니다.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면서 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머리 좋고 독기 오른 젊은이들이다.

주변에 혁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를 둔 부모가 있다. 듣기로 이 아이는 그 지역에서 가장 독서량이 많고 창의적인 아이다. 처음 입학해서는 학교 가기 싫다고 했단다. 같은 반 아이들과 대화도 잘 안통하고 수업 진도도 느려서. 그런데 몇 달이 지난 지금은 학교 가는 걸 너무 즐거워한단다.

수업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친구를 챙겨주고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같이 수업 계획을 짜는 것이 행복하다는 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가지고 있는 달란트가 다르다. 그 아이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지적인 자극이고 세상에는 자기만큼이나 똑똑한 아이들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많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 것이다.

재능과 소질을 무시하고 똑같은 아이들을 만들겠다는 이 무시무시한 구상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가 슬슬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현재 67개인 혁신 학교를 200개까지 늘이겠다고 했다.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은 원하는 학교를 모두 혁신 학교로 지정해서 임기 내 1,000개까지 확대할 계획이란다.

이런 왜곡된 세계관에 멀쩡한 아이들이 물들고 멍들게 생겼다. 국가 경쟁력 하락이란 측면에서도 불을 보듯 결과가 뻔하다. 하긴 인구 1,000만의 거대 도시를 책임지는 서울 시장은 시계 바늘을 되돌려 서울을 촌락 공동체로 만들고 있다.

협동조합과 마을 공동체 사업 등이 도시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좌파 교육감까지 가세했다. 그 잘못된 세계관과 비현실적인 흐름을 올바른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몰고 간다. 선배 한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선진국이 되기 싫은 모양입니다.” 120% 동감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아이들이 불쌍하다.


2014. 8. 6 <미디어펜>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mediapen.com/news/articleView.html?idxno=43396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