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왜 ‘휴머니스트’가 되었나
독일은 왜 ‘휴머니스트’가 되었나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4.09.17 17: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분쟁지역 개입불가’ 원칙 깨고 쿠르드 지원하는 메르켈 총리, 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11일 이라크 내 이슬람국가(IS)에 대한 공습을 결정하면서 중동사태는 본격적인 강대국들의 분쟁개입 양상을 띠게 됐다. 미국은 IS지역 내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자국의 시민이 이슬람 테러세력에 의해 참수되는 상황을 목도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보복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독일이 함께 나서는 모습은 다소 의아하다. 지난 2일, 메르켈 총리는 “IS의 반(反)인륜적인 행태를 저지하기 위해 쿠르드 자치공화국에 무기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쟁지역에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독일의 원칙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규모도 컸다. 1일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독일 정부가 내각 회의를 거쳐 쿠르드 자치정부에게 지원하기로 한 무기는 수천 정의 기관총과 장거리 대전차 미사일 30기, 공격용 소총 1만6000정, 보병용 장갑차 5대 등 7000만 유로(약 935억 원)에 달한다.

우르술라 폰데르 라이옌 독일 국방장관은 “독일의 지원으로 쿠르드 민병대 ‘페쉬메르가’ 병력 4000명이 충분히 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일 정부는 살상용 무기뿐만 아니라 현금 50만 유로와 헬멧 및 보호 장비 4000개, 무전기 700대도 지원하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독일 내 여론은 크게 요동쳤다. 독일 공영방송 ARD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중 60%가 쿠르드 자치정부에 대한 무기 지원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 불구하고 지원 결정한 메르켈 총리

이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적극적으로 소통에 나섰다. 메르켈 총리는 의회연설을 통해 “매우 조심스럽게 내린 결정”이라고 강조하며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준동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독일과 유럽 전체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어 분쟁 지역에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깨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전범국가가 된 후 지난 70년간 타국 분쟁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해 왔다. 지난 2003년 미국이 이라크 공습을 감행했을 때에도 독일은 다른 우방국과 달리 국제법 위반을 명분으로 파병을 거부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메르켈 총리는 “잔혹한 학살과 테러행위를 일삼는 IS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다.

어느 한 국가가 자국의 실리적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인도적 차원에서 전쟁에 개입하는 예는 역사에 없었다. 국제정치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칼 슈미트는 독일인이었고 나치를 지지했으나 그의 현실주의 정치론은 오늘날 국제정치학에서 ‘비공식적’인 금과옥조에 해당한다.

그런 점을 상기해 보면 역시 독일에게도 이라크 지역의 쿠르드 자치정부와 모종의 이해관계가 있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 중동의 쿠르드는 독일에게 친구이며 IS는 독일의 적인가. 이 문제는 향후 중동정치를 관측하는 데 결정적인 망원경이 된다.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담 후세인 축출 후에 이라크 내에서 벌어진 국제 외교전이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은 이라크 자치정부를 향해 매우 분주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2009년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라크를 깜짝 방문해 놀라게 하더니 곧이어 독일 외무장관이 기업인들을 인솔하고 이라크를 방문했다. 이 두 인물들은 2003년 미국의 대이라크 침공 시에는 쌍수를 들고 반대했던 사람들이었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가 당시 현지 동향보고로 제작한 문서에는 기가 막힌 사연이 담겨 있다. 프랑스는 사담 정권 시절 이라크에 무기를 공급하는 주요국이었으며 독일 또한 사담 정권과 큰 거래를 하고 있어 미국의 침공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담 정권 축출은 프랑스와 독일에게는 ‘판 갈아엎기’의 긴급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라크 자치정부는 미국의 도움 없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수립했다.

독일은 이라크 자치정부에 막대한 경제 지원과 투자를 약속했다. 외무장관과 함께 기업인으로 방문한 자동차 제조업체 다임러 AG(Daimler AG)는 이라크 내 중장비 차량 공장 건립사업안을 제시했다. 독일 경제부는 자국 기업인의 이라크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대사관과는 별도로 바그다드와 아르빌에 기업지원 사무소 설치를 계획했다.

 

‘휴머니즘’이면의 ‘현실적’ 이유들

하지만 이라크 자치정부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간의 분열과 반목으로 구심점을 잃고 이슬람국가(IS)의 영향력에 급속히 빨려들어 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들과 대항관계에 있던 이라크 북부 쿠르드자치공화국(KGP)이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던 것.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지방정부는 헌법에 따라 자치권을 부여받은 곳으로서 아르빌, 다후크, 술라이마니야 등 3개 주로 구성된다. 면적은 약 8만3043㎢로 이라크 전체면적 43만4924㎢의 18%에 달한다.

이라크 전체 인구 중 쿠르드족은 440만 명으로 아르빌 주에 200만, 술라이마니야 주에 190만, 다후크 주에 50만 명이 거주한다. 쿠르드 지방정부 측은 향후 인구조사가 실시되면 이보다 훨씬 많은 500만 명 이상이 집계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독일은 과거 터키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이 쿠르드인들을 지원해 왔다. 독일에서 보게 되는 아랍인들의 대부분은 쿠르드인들이며 이들에게 독일 정부는 이민과 근로, 그리고 교육을 제공했다. 그런 인연으로 쿠르드 내에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친(親)독일 성향을 띤다. 그러한 쿠르드인들이 이라크 내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IS와 맞서 투쟁하는 역할을 띠면서 독일은 쿠르드를 통한 중동의 실익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 여기에 향후 쿠르드 자치공화국이 독립할 경우, 이 지역의 막대한 석유자원은 독일의 입장에서 놓칠 수 없는 경제적 이익이 된다. 우리가 오늘 중동산 원유를 ‘쿠르드 오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된다.

국제정치는 선과 악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국가의 이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독일이 과거 중동문제에 평화주의 원칙을 고수했던 것도 이라크와 거래를 했기 때문이며, 지금 다시 그 평화주의 원칙을 깨는 것도 이라크 내에 독일의 이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포커스를 한국으로 돌려보자. 오늘날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맹목적 반일감정은 어떤 국가이익에 속하는 것일까. 50년간의 평화원칙을 깨면서도 쿠르드 군사지원에 나서는 독일을 보며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