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 언론인, 정치인 최경환의 세 갈래길
관료, 언론인, 정치인 최경환의 세 갈래길
  • 이원우
  • 승인 2014.09.19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물탐구
 

마치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하다. 한 편의 시나리오라고 해도 좋겠다. 영화로 만들어 내걸면 오히려 너무 뻔해서(?) 관객들이 외면할지도 모를 성공기. 현 기획재정부 장관이자 경제부총리인 최경환의 삶이 그것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1955년 경상북도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이후 남성국민학교-경산중학교-대구고등학교를 거쳐 1975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78년에는 재학생 신분으로 제22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1979년 졸업).

1980년 청도군청 행정사무관 시보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0년부터 14년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대외경제조정실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 중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에 유학해 1991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유학은 여러 각도에서 ‘공무원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연수생 신분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던 그는 대다수의 동료들이 석사 2년 기간을 마치고 귀국해 ‘연공서열’을 쌓는 데 집중했던 것과는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박사과정까지 추가로 2년을 더 미국에서 머물렀다.

공무원답지 않은(?) 공무원, 파격을 감행하다

이 시기는 최경환 부총리의 주요 인맥이 형성된 시점이었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그는 현 산업통상자원부 윤상직 장관과 동향(경북 경산) 출신이자 위스콘신대 동문, 행시 22회 동기다.

안종범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새누리당 정책위 부의장 강석훈 의원, 김영민 특허청장, 최종구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 백운찬 前 관세청장 등과도 위스콘신 동문인 최 부총리는 작년까지 대구고 재경(在京) 동창회장을 맡기도 했다. 대구고 주요 인맥으로는 이순우 우리금융지주 회장,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본부장, 전병조 KB투자증권 부사장 등이 꼽힌다.

최 부총리는 1995년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다 1997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실 보좌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이후 예산청 기획관리실 법무담당관을 맡으며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는 듯 보였던 그는 다시 한 번 의외의 행보를 택했다. 1999년 5월부터 2002년 9월까지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과 편집국 부국장을 맡았던 것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최 부총리는 공무원에서 논조가 명확한 언론인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기간 최 부총리가 썼던 칼럼에 대해서 한국경제신문은 “정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는 반면 기업의 자율은 극대화해야 한다는 시장·기업 친화적인 경제관을 시종일관 펼쳤다”고 평가하고 있다(2014년 6월 13일 기사).

최 부총리는 1999년 7월 2일자 칼럼에서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은 위기 극복에는 도움을 주지만 장기화될 경우 경제 주체의 자율성을 제약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기 마련”이라고 썼다. 2001년 11월 27일자 칼럼에서는 “정부가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제도와 같은 직접적이고 차별적 규제에 의존하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언론인으로서 각종 방송 대담과 토론회에 약 100여 회 출연하기도 했던 그가 다시 정계로 진출한 계기는 2002년 16대 대선이었다. 이회창 대통령후보 경제특별보좌관을 맡아 활약했던 그는 2004년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금배지를 달았다(이후 18대와 19대 총선에서도 당선).

이른바 친박(親朴)으로 분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 MB정권의 지식경제부 장관직을 맡으면서는 ‘MB노믹스’의 밑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최 부총리는 자신의 저서 ‘산업정책 콘서트’에서 장관으로 일했던 16개월간의 이 시기를 ‘500일간의 일요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일’만 하는 날밖에 없었다는 의미.

초이노믹스, 혹은 최경환의 믹스(mix)

그랬던 그가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최경환노믹스’를 추진하고 있다. 2014년 7월 15일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임명되면서부터다. 시선은 여러모로 엇갈렸다. 공무원이라 하기에는 논조가 명확한 글을 써왔고, 단순한 정치인이라고 하기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확실한 전문성을 갖춘 인물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다채로운(mixed) 경력 중에서 ‘부총리 최경환’이 어떤 정체성을 가장 앞줄에 내세울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랬기에 그가 “기업의 사유재산을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는 ‘사내유보금 과세’ 카드를 집어든 건 시장주의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실망감을 자아냈다.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으로서의 최경환과 어쩔 수 없이(?) 정치를 해야 하는 최경환의 정체성 충돌에서 후자가 승리하는 구도가 연출됐기 때문이다.

초이(Choi)노믹스는 더 험난한 여정을 앞두고 있다. 지난 11일 최경환 부총리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설전(舌戰)은 초이노믹스를 견제하는 움직임이 여야와 좌우를 막론하고 존재할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날 오전 담뱃값 인상을 설명하기 위한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치는 최 부총리에게 김 대표가 공개적으로 반론을 폈던 것이다.

지금껏 딱히 시장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인 적이 없는 김무성 대표로부터 의외로 ‘시장주의적 공격’이 들어온 것은 초이노믹스의 미래에 대한 중차대한 사실 하나를 환기시켰다. 대한민국에서는 무엇을 하든 ‘정치의 자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준엄한 사실 말이다.

최경환 부총리의 화려하고 다양한 ‘스펙’중에서 그가 다음으로 강조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관료인가, 언론인인가, 정치인인가? 그 카드의 색채가 초이노믹스의 앞날을 결정지을지도 모르겠다.


이원우 기자 wonwoops@futurekorea.co.kr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