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10년, 그리고 그 너머
자유주의 10년, 그리고 그 너머
  • 이원우
  • 승인 2014.10.0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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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우의 블랙스완
 

올해로 자유주의(Libertarianism)를 공부한 지 10년째가 된다. 미래한국의 편집위원님으로 다시 뵙게 된 김종석 교수님의 ‘경제학원론’ 강의를 들으면서부터 나의 인생은 격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6개월 뒤 박광량 교수님의 ‘기업과 경영’을 들은 뒤에는 스펀지가 수분을 빨아들이듯이 미제스와 하이에크와 밀튼 프리드먼에 몰입했다. 일련의 학습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인생을 갈라놓을 만한 멋진 체험으로 남았다. 자유주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명쾌하기 때문이다. 유레카!

‘유레카’ 이상의 어떤 것

자유주의를 공부하면서 그와 함께 따라온 게 하나 있었다. 무신론에 대한 관심이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중학교 이후로 교회에서 멀어지는 전형적인 케이스였던 거다.

자유주의를 공부하며 만나게 된 여러 석학과 논객들이 무신론 성향을 보인다는 것도 상당히 큰 영향을 줬다. 복거일,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여기에 하이에크까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메아리가 내게서도 울린 적이 있었다.

종교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게 된 체험은, 우습게도 연애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정말 많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난 20대였다. 그러면서 내가 2004년에 처음으로 느꼈던 자유주의의 ‘유레카’가 언제나 100% 정답이 될 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됐다. 한 사람의 삶 속에는 부족한 나의 자유주의 사상체계로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얼마든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정(家庭)이 갖는 압도적인 영향력에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와 가정은 곧 신의 다른 이름이었다. 개인은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만난 것이 미래한국과 보수주의(Conservatism)다. 미래한국 편집회의에는 거의 매번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닫고 귀를 열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정의 중요성을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 있는 한)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가고 있다. 자유주의를 공부하고 난 ‘이후’에 교회로 가는 사례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상당히 드물 거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미래한국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할 때 곧잘 나오는 질문 중 하나가 “괜찮으세요?”인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물론 나는 괜찮다).

종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던 내가 일순간 공동체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보수주의에서도 개인은 중요하다. 여전히 나는 사회 전반의 여러 논점들에 대해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스스로 좀 더 노력할 것을 당부한다.

나아가, 자력갱생이 도저히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국가’가 구제하는 게 원칙이라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 그들을 돕는 적당한 방법을 ‘찾는’ 것, 그들을 실제로 ‘돕는’ 것 모두에는 각각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간다. 국가(공무원)에게는 이 세밀한 작업을 끝까지 완수할 의지도 동기도 사명도 없다(이것은 공무원들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오히려 변호다).

추측이지만, 이 문제를 세금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심리의 근간에는 돈 몇 푼으로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건 해결책이 아니라 ‘기발한 핑계’를 생각해 낸 것에 불과하다.

바로 이 포인트에서 나는 종교의 소명이 몇 마디 쉬운 비난과 매도로 폄하돼선 안 될 이유를 본다. 훌륭한 종교인들에게는 진정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겠다는 진심의 의지가 존재한다. 이런 건 가까이에 두고 배워야 한다. 종교인들 말고 이 땅에서 누가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건국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역대 첫 본회의는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의 기도로 시작됐던 것이다.

이후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은 “누구도 오늘의 일을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처럼 똑똑한 인간이 왜 저런 나약한 소리를 했을까. 그는 알았던 것이다. 백 마디 이론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종교의 소명을 말이다.

개인은 중요하다. 하지만 공동체도 중요하다. 두 번째 문장을 덧붙이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이제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인다. “종교도 중요하다.” 무신론자인 당신에게조차도 그렇다.

이토록 중요한 종교가 정의의 구현을 기치로 내걸고서 ‘정권퇴진 시국미사’ 같은 일을 벌일 때, 나는 이제 10년 전처럼 한 마디 쉬운 말로 꺼지라고 말할 수 없다.

보다 통렬한 반성이 교계 내부에서 나오길 바라게 되고, 한편으론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종교인들이 적극적인 반박의 흐름을 만들 필요성도 요구하게 된다. 나의 공력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일련의 과정은 자유주의만으로 벅차 보일 때도 있다. 10년 전의 내게 이런 말을 했다면 기를 쓰고 반박했겠지만 말이다.

2013년을 끝으로 ‘서른 살의 자유주의’ 코너는 끝을 맺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더 이상 서른 살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서른 두 살의 자유주의’라고 해도 될 일이었지만 자유주의 간판도 떼어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하고 다닐 이유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슨무슨 주의자로 나 자신을 수식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삶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불확실성에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그래서 코너 이름을 ‘블랙 스완’으로 지었다. 백조는 전부 하얗다는 고정관념을 깬 것은 검은 백조 한 마리의 출현이었다.

우리 삶에는 그런 작은 가능성 하나가 전부를 바꾸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이제부터는 한 마리 검은 백조 같은 글을 쓰기 위해 애쓰고 싶다. 그것이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던 자유주의 10년, 그리고 그 너머로 가는 길임을 믿으면서.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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