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에게 실망했다는 사람들에게
안철수에게 실망했다는 사람들에게
  • 이원우
  • 승인 2014.10.0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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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우의 블랙스완] 여러분들에겐 실망할 권리가 없다
 

학창시절 그런 류의 남자 아이들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고운 손과 가녀린 목소리의 소유자들. 절대 화를 내지 않으며 쉬는 시간엔 주로 세계문학전집을 읽는다. 간혹 다른 친구들에게 물건이나 돈을 빌려주는 경우가 있는데 흥미롭게도 자신의 물건을 ‘갚은’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빌려줘서 고마워.”
“아냐, 잊지 않고 잘 돌려줘서 내가 고마워.”

나란히 서 있기만 해도 왠지 내가 나쁜 놈이 돼 버리는 것 같다. 세상에 대해 별다른 불만 없이 잘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저런 애만 보면 반항아와 일탈자를 자처하고 싶어지면서 콧구멍에서 버섯구름이 내뿜어졌다.

살면서 만난 사람들을 유형별로 분류하는 건 예전에 버린 악습관이지만, 저런 아이들이야말로 자존심(ego)이 강하고 비타협적이었다고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자신을 정점으로 구성된 하나의 역할극 같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필요한 것은 모든 걸 초월했다는 듯한 느긋한 미소뿐. 세상은 보다 더 비뚤어지고 더러운 편이 좋다. 그래야 그 위를 딛고 선 자신의 고결함이 더욱 돋보일 테니까.

‘새 정치’의 ‘새’는 NEW가 아니었다

학교 졸업 이후 알게 된 유명 인사들 중에서 위의 유형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이 둘 있었다. 한 명이 안철수고 다른 하나는 박경철이다. 그 둘이 만나서 청춘콘서트인지 뭔지를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뭔가가 단단히 잘못된 게 아닌가 싶다. 2009년에 낸 책 ‘유니크’에 썼던 대로 “우리더러 힘내라고 말하고 싶은 어른들이여, 당신들이나 힘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안철수의 정계입문 무렵 박경철은 ‘자기혁명’이라는, 겨울날의 입김처럼 기억 속으로 사라진 책을 낸 뒤 그리스로 갔다(그리스 책도 냈는데 그 내용도 기억 안 나기는 마찬가지). 그리고 안철수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 살고 있다. 일단 금뱃지를 달긴 했는데 처음엔 휘황찬란하게 보이던 그 물체가 조금씩 똥색으로 보이는 기적의 풍경을 연출하면서 말이다.

정치인 안철수가 가장 박수를 많이 받은 순간 ^-^

안철수의 이미지는 뒤집힌 2차 함수, 그러니까 포물선의 형태를 그리고 있다. x축이 시간이고 y축이 이미지라면 그래프의 정점은 그가 정치인이 되겠다고 선언했던 순간에 최고점을 찍었다. 그 이후론 좋았던 이미지가 기하급수의 속도로 추락 중이다. 영원히 어린 왕자의 편일 줄 알았던 대학생들 입에서 “안철수의 새 정치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들이 흘러나올 때 게임은 이미 끝나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창당을 하겠다고 거창하게 나섰다가 민주당이라는 ‘헌 정치’ 품에 쏙 안겨버린 그의 현재 이미지는 참 말하기 뭐한 지경이 돼 버리고 말았다. 웬만큼 그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던 사람들조차도 “이번에는 진짜 실망했다”며 아우성이다.

그런가? 실망했다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당신들에게는 이제 와서 실망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계입문 이후에도 정치인 안철수의 얄팍함을 판단할 근거는 숱하게 널려 있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실망을 했다는 건지 나는 그 심리가 더 궁금하다. 안철수와 민주당이 호흡을 맞춘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말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말하겠다. 그 수많은 단서 위에서 새 정치라는 헛꿈에 취해 잠이나 잤던 자들에게 이제 와서 실망할 권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인 안철수가 가장 야유를 많이 받은 순간 ㅠㅠ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정치인 안철수’의 실체가 새로 개업한 노래방 앞에서 춤추는 풍선인형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안철수의 생각’만 읽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진중한 상념의 기준은 보이지 않고 그저 어떻게 해야 절대다수의 대중들에게 인기를 누릴 수 있을지만 적혀 있는 신비로운 책.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대한 팟캐스트 리뷰방송 ‘베스트셀러를 읽는 남자’에서 안철수를 “대중의 노예”라고 선언했던 것이다(욕 많이 먹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대중들이 안철수에게 속은 게 아니라 그 역이 정답인 것 같다. 한국인들이 자신의 책을 깊게 읽고 현명한 판단을 해 줄 거라고 믿었던 안철수야말로 ‘안철수 바람’의 가장 큰 피해자일 가능성은 없을까.

국민은 오로지 자기들 수준에 맞는 정치인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정치판이 썩었다고 말하기 전에 돌아봐야 할 것은 그 사회의 지적 수준이다. 그동안 무슨 책을 몇 권이나 읽었기에 안철수 같은 ‘정치인 지망생’ 하나를 판단 못 하는 건가?

내심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던 노무현을 마음속에서 밀어내는 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정일 앞에서 아양에 가까운 애교를 떨었음이 확인된 NLL 녹취록 파문 무렵이었으니 근 10년이 걸린 셈이다.

안철수를 판단하는 데에는 그 절반의 반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도 하는 이 판단을 지금까지 못 해온 한국의 민주주의에 과연 희망이란 게 존재하는지 의심스럽다. 안철수에게 실망했다고? 그런 말씀 마시라. 나는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더 실망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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