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 담긴 또 다른 ‘노아’
영화 속에 담긴 또 다른 ‘노아’
  • 이원우
  • 승인 2014.10.08 17: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원우의 블랙스완
 

(※ 이 칼럼에는 영화 ‘노아’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감독이 대런 아로노프스키라고 했을 때 심상찮긴 했다. 그는 2011년 (이 코너의 제목과는 관계없는) ‘블랙 스완’이라는 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인간 내면의 이중성과 복잡성을 탁월하게 그린 이 작품을 감명 깊게 봤었다. 그가 바라보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어떨지 궁금했다.

개봉 이후 논란은 예상보다 훨씬 거세게 일고 있다. 일반적인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매우 철학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영화이기에 그렇다. 기독교인들의 격앙된 반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일부 언론에서는 신자들이 ‘평점 테러’를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단어를 수정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0점을 준다고 무조건 테러는 아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개개인이 진심으로 느낀 실망감을 표출하는 수준 같다. 이 영화는 기독교인들의 ‘역린’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광기어린 노인’으로 그려진 노아

근본적인 이유는 이 영화가 노아를 ‘광기어린 노인네’ 쯤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창세기 6장 9절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라는 말씀을 전복시키는 설정이다.

영화에서 노아의 선한 모습은 별로 볼 수가 없다. 성경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노아가 완전한 자였는지 알 만한 힌트가 부족하다. 오히려 노아는 (권위주의를 넘어선) 전체주의적 리더다. 방주로 들어오려는 외부인들을 살해할 뿐더러 인간구원을 동물구원에 종속시키는 동물애호가(?) 같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인간 심판에 집착한 나머지 새로 태어난 손녀를 살해하려고도 한다. 그에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조리 멸절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대체 어디서 이런 확신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을 불편하게 만든 첫 번째 코드일 것이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노아를 왜 이렇게 묘사했을까. ‘글’과 ‘그림’의 차이에서 힌트를 찾고 싶다. 기타노 다케시는 “머릿속에서 카메라를 돌리지 못하면 영화감독 같은 건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아로노프스키는 성경 말씀을 탐독했다는 점에서는 기독교인들과 같았지만 그 말씀을 그림으로 구현해 보려는 직업정신을 발휘하면서 나름의 해석을 얹었다.

영화에서 대홍수의 시작은 어마어마한 살육전과 함께 온다. 노아는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마음 하나로 그 수라장을 굳건히 통과했다. 그러나 그 역시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비정상(狂氣)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고 해서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다.

노아의 광기는 대부분 ‘우리 가족만 살아남았다’는 부채의식에서 기인한다. 그가 지금껏 해온 일들의 잔혹사를 돌이켜 보면 다분히 근거 있고 인간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 노아의 모습이 불편했다면, 어쩌면 그건 노아를 지나치게 완벽한 존재로 상정한 함정에 빠진 결과일 수도 있다. 당대에 완전했을지언정 그도 한 ‘인간’이었다고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영화 후반에서 손녀를 죽이려는 노아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연상케 한다. 글자로서의 아브라함이 아니라 ‘실제 인간’ 아브라함을 한 번 상상해 보자. 그는 과연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맘씨 좋은 장로님의 모습에 가까웠을까, 의인인 건 알겠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내뿜어 경원시하게 되는 사람에 가까웠을까.

영화 ‘노아’는 우리에게 성경이 현실로 화(化)하는 것의 묵직한 잔혹함을 상상해보도록 유도한다. 기독교는 마음의 평화를 지향하는, 얌전한 수준에서 멈추는 종교가 아니다. 선과 악이 있고 심판이 있는 종교다.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 마음에 드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들만 마주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신자들을 분노케 만든 부분은 영화에서 ‘하나님’ 대신 ‘창조주’로 호명되는 신의 가치중립적 태도다.

인간의 죄를 통제하지 않는, 때로는 방관하며 인간에게 휘둘리기까지 하는 존재. 이 설정은 신자들이 이해해줄 필요는 없는 부분 같다. 다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의미를 이런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반영한 설정이 아닐까 싶다. 애매할 땐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해보자. 변호인 같은 3류 영화 말고 이 정도 되는 작품이라면 충분히 해줄 수 있는 말이다.

 

신본주의 vs 인본주의

그 외에도 루시퍼나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시키는 타락천사가 인간을 돕는다는 점, 뱀의 껍질을 팔에 두르고 후손을 축복하는 장면 등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부족한 지면으로 거기에 대한 얘기를 전부 할 수 없어 아쉽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다.

막상 성경에선 그다지 존재감이 크지 않은 두발가인은 이 영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공언하며 신에게 도전하는 존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두발가인의 도전적 태도야말로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정점이다. 그리고 신본주의(神本主義)의 대표인 노아는 한 치의 타협도 없이 그와 혈투를 벌인다.

문제는 두발가인의 논리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점이다. 그가 하늘을 보며 “저도 인간입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 그런데 왜 저와는 대화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탄식하는 장면은 심지어 매우 울림 있게 다가온다. 비뚤어진 그의 마음은 신의 자리를 자기 자신으로 대체하려는 바벨탑적(的) 시도로 치닫게 된다.

인간의 역사는 종종 그렇게 두발가인과 노아의 결투이곤 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근본적인 ‘교리’는 결국 기독교 이론을 흉내 낸 것이다. 결정적인 차이는 이론의 꼭대기에 신이 아닌 인간이 서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두발가인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투는 현재 한반도에서도 진행 중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통일 이후에도 거대한 격전이 예고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 속 노아와 영화 속 노아의 차이를 따져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인간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일지도 모른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