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가 말하려 했던 것
스코틀랜드가 말하려 했던 것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4.10.10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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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독립이 국민 55.4%의 반대로 부결됐다. 하지만 영국과 스코틀랜드 모두를 놀라게 했던 것은 찬성 44.6%라는 비율이었다. 30%에도 못 미치리라는 예상을 크게 웃돌았던 것.

어쨌든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와 엘리자베스 여왕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활짝 웃었지만 그 속은 사실 쓰리기 한이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영국이 스코틀랜드에 약속한 자치권의 확대가 만만치 않은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당(SNP)은 ‘언제든 재투표는 가능하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영국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비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바라보는 국제사회는 제각각 자기 이해관계를 점쳤겠지만 정작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 간에 얽힌 과거 통치관계들과 북해유전, 그리고 파운드화의 문제, 스카치 위스키 정도가 세인들의 관심이었다.

스코틀랜드 독립을 바라보는 전 세계 자유주의 그룹은 이 문제가 국제질서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될 어떤 비밀을 알고 있었다. 언제든 다시 스코틀랜드 독립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면 이 기회에 그러한 숨겨진 비밀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1707년 스코틀랜드에서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통치권자인 로즈베리 가문이 재정난으로 스코틀랜드 주권을 영국에 1만2000파운드에 팔아 넘겼고 이를 계기로 스코틀랜드 의회와 영국 의회가 합쳐졌다. 그러한 상태의 스코틀랜드에는 사실상 이렇다 할 정부 기능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이 이 역사적 사건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바로 ‘작은 정부(minarchy)’라는 현상이 이곳 스코틀랜드에서 전개됐던 까닭이다. 작은 정부는 홉스적 계몽주의에 따르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질서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온갖 범죄와 사기와 약탈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의 부재 상황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들이 생겨나고 문맹률이 떨어졌다. 18세기에 이르러 스코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기록했고, 시민들이 가장 많이 고전을 읽는 나라가 됐다. 에든버러 대학과 글래스고 대학으로 유럽의 학생들이 유학을 왔고, 특히 미국의 지식인들이 스코틀랜드에 심취했다. 그런 이유로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아테네’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렇게 볼 만한 사례가 있다.

1768년 인류 지성사에 획기적인 사건을 일으킨 브리태니커 백과사전(The Encyclopedia Britannica)은 영국 런던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작은 도시 에든버러에서 출판됐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영어로 쓰인 백과사전이다.

브리태니커는 1768년에 초판이 나온 이후 계속 쓰여서 100명의 전속 집필자와 4000명의 기고자를 뒀다. 그 가운데 110명의 노벨 수상자가 있었고 5명의 미국 대통령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학자나 교수가 아니었다. 목사나 사업가, 교사, 목수, 의사와 같은 평범한 계층의 시민들이었다.

이러한 스코틀랜드의 지식혁명은 ‘사변(思辨)협회’(speculative society)라는 토론문화가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발제와 토론의 세미나와 콜로키엄 등의 지식활동은 사실 이 사변협회의 전통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당시 에든버러 사변협회의 토론 주제 리스트가 남아 있다. 그들의 주제는 이념에 관한 것이 아니라 행복과 도덕의 실현을 위해 어떤 교양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에 만개했던 ‘자생적 질서’

예를 들어 1764년의 한 토론의 주제는 ‘결혼과 독신 중에 어느 편이 더 덕성을 높일 수 있는가’였다. ‘민주국가와 독재국가 중에 어느 체제가 더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와 같은 주제도 있었다. 이러한 삶의 문제에 대해서 에든버러 사변협회 회원들은 역사, 심리, 철학, 신학, 문학 등 실로 다양한 영역을 동원해 해답을 찾고자 했다.

이를 통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라는, 당시 유럽을 휩쓴 프랑스 계몽주의와는 다른 전통이 탄생했다. 그들은 형식논리 중심의 이성적 추론보다는 경험적 사실과 관습, 그리고 전통이 만들어 내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에 주목했다.

아울러 프랑스 계몽주의가 중요시하는 ‘평등’의 이념보다 도덕 감정과 공감력을 가진 개인들의 ‘자유’와 ‘공동선’에 주목했다. 오늘날 자유주의를 의미하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바로 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작은 사변협회 토론 모임으로부터 싹튼 것이다. 이에 대해 영국 ‘가디언’ 지는 스코틀랜드 지성이 다름 아닌 오늘날 근대 유럽을 의미하는 ‘western’이라고 평가한다.

우리가 흔히 ‘영국 위인들’로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그의 뒤를 이은 고전파 경제학의 대가들인 제임스 밀과 존 스튜어트 밀 부자, 철학자 데이비드 흄, 증기기관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 절대 온도의 창시자인 과학자 켈빈 경, ‘연합 왕국’의 중앙은행이 된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의 창립자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erson) 등 많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18세기 이후 ‘대영국’의 사상·제도·기술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끼쳤다.

이들은 상식(common sense)을 한 사회 내에서 중요한 문화적 진화 요인으로 파악했다. 미국의 독립혁명 이념은 바로 이러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이었다. 프랑스 혁명을 낳은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이 아니다. 작은 정부를 가졌던 스코틀랜드에 어떻게 이러한 지식문화 창달이 이뤄졌는지, 그 비밀은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비밀은 이렇다.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진화, 다시 가능할까

정부의 기능이 축소된 공공의 영역은 공백으로 남지 않고 민간의 질서가 들어왔다. 그 주역들이 바로 교회들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가 바로 그것이다. 교회들은 정부를 대신해 학교를 세웠고 거기서 성경을 가르쳤다.

그 결과 17세기에 이미 스코틀랜드 국민의 76%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교회는 의사들과 교인을 단체로 의료보험을 조직했으며, 그 지혜는 필라델피아, 보스턴 등 미국으로 전파됐다. 교회는 작은 정부를 대신해 시민들을 교육하고 만남과 교제의 장을 제공했다.민간의 비공식적 질서가 정부의 공식적 질서를 대신하면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자생적 질서’ 그리고 ‘문화의 진화’라는 개념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한 지성이 미국의 독립혁명을 이끌었고 사회주의에 맞서 자유주의 이념으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그런 전통은 지금 스코틀랜드에서 좀처럼 기억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은 스코틀랜드가 오늘날 영국에서 가장 후진적이고 사회주의에 찌든 지역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영국의 노동당이 그 의석의 절반을 스코틀랜드에 할애해 온 이유다. 그렇기에 역으로 스코틀랜드가 독립할 경우 그들이 동유럽 국가들처럼 사회주의와 결별하는 시기가 빠르게 올 것이며 그 가운데 전 세계 자유주의 이념의 중요한 정신적 역할을 했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재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갖게 됐다.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진화가 스코틀랜드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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