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목사의 젊은 교회, ‘말씀의 새벽’ 연다
젊은 목사의 젊은 교회, ‘말씀의 새벽’ 연다
  • 미래한국
  • 승인 2014.10.1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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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가 뛴다] 내수동교회 박지웅 목사
▲ 온누리교회 박지웅 담임목사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내수동교회의 박지웅 목사. 그는 10년 전 목사 안수도 받기 전에 담임목사로 영입된, 전례가 없는 이력을 갖고 있다. 2004년 9월 12일 내수동교회 공동의회에서 ‘박지웅 강도사 목사 안수 후 위임목사 청빙결의’가 가결됐다. 박지웅 목사는 2004년 10월 26일 목사 안수를 받고 20일 후 50년 전통의 내수동교회 8대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박지웅 목사의 나이는 만 35세였다. 내수동교회의 6대 목사이자 원로목사인 박희천 목사와 성이 같아 “세습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받았다. 그러자 교인들 사이에서 주보에 ‘세습 아님’이라는 글자를 넣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극적인 부르심

7대 목사가 목회 5년 만에 사임을 하자 교회에서는 1년여 동안 여러 목사를 초빙하여 설교를 듣는 등 새 담임목사 찾기에 나섰다. 밖에서 인물을 찾았지만 수확이 없자 “설교를 잘해 대학부를 2배 부흥시킨 박지웅 강도사가 목사 안수를 받으면 담임목사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인 것이다.

당시 박지웅 강도사는 선교지에 가서 공부도 하고 현장 경험도 할 요량으로 대학부를 사임한 상태였다. 몇 개월 동안 준비를 하고 비행기 티켓까지 다 알아본 상황에서 교회의 부름을 받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결심하게 된 것이다.

“소심한 성격에 뭔가를 시작하면 그것 하나만 생각한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박지웅 목사는 겸손함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내수동교회 분위기를 아는 사람이 오면 차분하게 잘 될 거라 생각해서 선택한 거겠죠. 내정된 분이 있었는데 갑자기 못 오게 되면서 여러 목사님들을 모셔서 선도 보고 설교도 듣고 했었어요. 여의치 않아 우리 교회 출신을 찾다가 제가 눈에 띈 거죠. 경험도 없는데 어쩌나 걱정하면서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하고 이러다가 8월부터 격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서울로 전학 와서 내수동교회에 출석하게 된 박지웅 목사는 고려대 서어서문학과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목사가 될 계획이 없었다. 전공보다 철학수업을 더 열심히 들었던 그는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던 중 목회에 대한 소명을 깨닫고 총신대학원에 진학했다. 내수동교회 출신 신학생을 사역자로 영입하는 전통에 따라 1998년 8월부터 대학부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형교회가 아닌 중형교회에서는 대학부가 활성화되기 힘들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1970년대 말에 이미 ‘내수동교회=대학부’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이 교회로 젊은이들이 몰렸다.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초기 부흥을 주도한 인물은 현재 사랑의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오정현 목사로 1978년 11월에 대학부 간사에서 일약 전도사로 발탁됐다. 오정현 전도사는 옥한흠 목사, 이동원 목사, 홍정길 목사, 박영선 목사 등 당대 유명 설교자를 초빙하는 등 탁월한 운영으로 부흥을 이끌었다. 박지웅 목사는 당시 담임이었던 박희천 목사가 일반 대학 출신을 전도사로 영입한 것은 ‘대단한 파격’이었다고 말했다.

“박희천 목사님은 조용하게 전통적인 목회를 하시면서 대학부에 대해 일체 간섭하지 않으셨어요. 믿고 맡기셨기 때문에 젊은 전도사들이 실력과 열정으로 대학부를 이끌어갔습니다. 제가 담임을 맡은 후에도 일체 간섭하지 않으셨어요.”

이후 내수동교회 대학부 전도사를 지낸 목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현재 교인 수만 명에서 수천 명 교회의 담임이 되었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남서울교회 화종부 목사,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 부산 부전교회 박성규 목사, 대구 내일교회 이관형 목사가 그들이다.

‘슈퍼스타’ 여럿 배출한 젊은 교회

이들은 모두 내수동교회 대학부 학생으로 시작해 대학부 전도사로 사역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백석대 임원택 교수와 황원선 교수도 내수동교회 대학부 출신이며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는 중고등부 전도사를 역임했다. 내사모(내수동교회 사역자 모임) 회원이 40여명에 이르고 매년 두세 차례 열리는 모임에 20여명이 참석할 정도로 이 교회 출신 가운데 목회자가 많다.

박지웅 전도사는 1998년 8월, 2호선 라인에 위치한 명문 대학의 학생들이 몰리는 교회로 유명세를 떨치던 내수동교회 대학부에 부임했다.

“다들 전문사역자 개념이 아닌 사사기 시대의 사사(士師) 같은 심정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대학부는 내 책임이다, 망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각오로, 사심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어라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훈련이 되어 모두들 큰 교회를 이룬 것 같습니다.”

박지웅 전도사는 2004년 3월까지 5년 7개월 동안 대학부를 두 배로 부흥시켰고, 대학부 사역이 목회 경험의 전부였다.

“목회의 애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데 목회는 사람의 죄성(罪性)과 부딪쳐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입니다. 모르니까 했지 알았으면 못했을 겁니다.”

박 목사의 부임에 대해 ‘애정 어린’ 반대를 하는 교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부목사 경험이 있는 사람이 와야 하지 않나, 너무 빨리 목회를 시작하면 본인에게도 좋지 않다, 유학 갔다가 천천히 하는 게 좋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대학부에서 6년여 동안 사역을 했지만 애들과 놀았다고 하는 게 맞겠지요. 새로운 사역지도 아니고, 후배들과 형 동생 하면서 지냈으니까요. 진정한 목회를 한 게 아니어서 그런 우려는 당연했지요.”

6대 박희천 목사가 은퇴할 때 출석교인 800여명 규모였는데 7대 목사가 사임할 때 교인이 500~600여명 정도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기성교회로는 적지 않은 규모에다 입지적으로 좋은 자리라는 얘기들을 했는데 저는 그런 것에 대한 센스가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여러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날 사안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잘 몰라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박지웅 목사는 담임목사로 부임할 때 한 가지만 생각했다고 한다.

“예배가 바로 서고 영적으로 말씀 위에 바로 서서 힘든 상태가 회복되는 것에만 관심을 갖자, 그 외의 사안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겠다, 한 귀로 흘리고 오로지 설교만 하자, 기도와 심방만 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지냈습니다.”

부임 후 2배 이상 ‘급성장’

1975년에 부임하여 1998년에 은퇴한 박희천 원로목사는 28년간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과 히브리어를 가르친 석학이다. 내수동교회는 말씀과 심방에 주력해온 전통적인 교회로 교인들의 학력이 높고 대체로 조용한 성향이었다.

“원로목사님이 목회하실 때 별다른 프로그램을 시행하지 않으셨어요. 저도 교회 분위기에 따라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오직 기도와 말씀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4년 정도 지난 뒤에야 제자훈련을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인구 공동화 현상을 보이는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있어 뭔가 시도하기 힘든 형편이기도 했다.

“우리 교회의 특징은 교회 주변에 사는 교인이 없다는 겁니다. 주중에 교인들이 모인다는 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구역 사정에 맞춰 한 달에 한 번, 심지어 1년에 한두 번 주일에 교회에서 간단히 모이는 게 전부였죠. 무얼 하든 뭔가 바꾼다기보다 없는 걸 만든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게 훨씬 빠를 정도로 조용한 교회였습니다.”

내수동교회는 이면도로에서도 한참 올라온 곳에 위치해 잘 보이지 않는다. 주택가 한 가운데 있으니 당연히 주차 공간이 없다. 주변의 주택들도 대부분 사무실이나 상가로 용도변경을 해 주말이면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주변에 주상복합아파트 몇 동과 비즈니스 빌딩만 즐비할 뿐 아파트 단지는 찾을 길이 없다. 교인이 폭발적으로 늘기 힘든 환경이지만 박지웅 목사가 부임한 이후 교인이 2배 이상 늘어 현재 1300여명이 출석하고 있다. 이 가운데 400여명이 대학·청년부이다.

박지웅 목사는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마음속으로 ‘소그룹 운동’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초대교회는 소그룹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소그룹에 주력하는 교회, 구역이 잘 되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전략으로만 접근하는 게 아니라 초대교회를 닮은 영성과 본질적인 것을 찾는 교회를 꿈꾸었습니다.”

10명 정도의 소그룹 구역을 활성화 시키려는 이유는 말씀과 기도와 성령운동을 담기 위한 그릇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셀 운동과 제자훈련을 많이 하는데 그건 그릇일 뿐 거기 담긴 내용이 중요합니다. 내용물이 있어도 그릇이 없으면 담을 수가 없고, 그릇만 번듯하다고 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목회 초기에 빨리 드라이브를 안 한 건 내용물과 그릇의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공적으로 소그룹을 거론한 건 3~4년 전부터이고 기도와 말씀과 성령운동으로 다져나가고 있습니다. 구역마다 편차는 있지만 조금씩 바뀌는 중입니다.”

박지웅 목사는 1주일 내내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매일 새벽예배를 인도한다. 담임목사가 새벽 강단에 서는 교회가 많지 않은 현실이지만 박 목사는 스스로의 영성을 위해서라도 새벽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설교 잘 하는 목사’ 비결은 새벽예배

“성경은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깨달아집니다. 새벽기도 현장에서 말씀을 나눌 때 생기가 생기는 것을 느낍니다. 평상시 3시간 준비하는 것보다 전날 밤이나 새벽에 30분 준비할 때 효율이 더 높아요. 본문이 이걸 말한다는 확신이 들면서 어디 가서도 배울 수 없는 걸 새벽예배를 통해 깨닫습니다.”

내수동교회 교인 누구를 만나든 박지웅 목사를 ‘설교 잘하는 목사’라고 말한다. 박 목사는 자신의 설교는 새벽예배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된다고 말했다.

서른다섯 살에 담임이 된 박지웅 목사가 생각하는 ‘담임목사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는 과연 몇 살일까?

“마흔 살 정도에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빨리 시작하면 시행착오를 겪고, 한 번 정도 기회를 더 얻을 수 있겠지요. 10년이 되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습니다. 새로 온 사람의 귀에 쏙쏙 닿게, 한마디를 해도 열 마디를 요약해서 말한 거 같이 설교를 잘하고 싶어요. ‘내 말이 아니라 성령에 붙들린 말을 해야겠다, 기도를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박목사는 옥한흠 목사가 제자훈련에서 강조했던 ‘본질을 붙들면 길이 보인다’고 했던 말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전했다.

“기본과 본질에 충실하다보면 더 폭발적인 성령운동의 기회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갈수록 단순한 교회, 구역이 잘되며 예배에 충실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대한민국 중심에 위치한 만큼 전 세계 선교사님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세계기도센터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젊은이 사역을 더 열심히 하고 싶습니다. 중형교회에 젊은이가 많이 모이는 걸 보고 다른 교회들이 관심을 갖고 일어나는 중입니다.”

내수동교회는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지난 6월 세미나, 비전트립 등을 필두로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10월 한 달 동안 감사예배와 말씀집회, 홈커밍데이, 특강, 음악회, 후원교회 목회자초청 1박2일 세미나 등을 실시한다. 강사는 박희천 원로목사, 오정현 목사, 송태근 목사 등 이 교회 출신 목회자들이다. 박지웅 목사는 60주년 기념행사 초대의 글에서 ‘역사란 이어달리기와 같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최선을 다하여 우리 바통을 다음 세대에 제대로 넘겨주어야 합니다’라고 피력했다.

글 / 이근미 선임기자 www.rootlee.com
사진/이재현 객원기자 lgrlg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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