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의 물은 황하와 섞이지 않는다
장강의 물은 황하와 섞이지 않는다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4.10.2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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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석의 역사파일]

중국에는 오래 전부터 오랑캐라는 개념이 있었다. 중화(中華)의 질서 안에 포획되지 않는 제 문화권에 대해 한족(漢族)은 북쪽을 적(狄), 남쪽을 만(蠻), 동쪽을 이(夷), 서쪽을 융(戎)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민주화 시위로 몸살을 앓는 홍콩은 바로 과거에 양자강(장강) 하류에 터 잡고 살며 그 문화를 일궈온 남만(南蠻), 즉 광동인들이었다. 그들은 황하를 중심으로 문화를 이룬 한(漢)족과는 처음부터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 양자강을 낀 상하이

뿌리부터 달랐던 한족과 월족

홍콩인들을 포함해 광동인들은 과거 월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북월과 남월로 나뉘었다. 그래서 북월이 곧 이 광동인들이고 남월이 오늘날 베트남이라 불리는 월남(越南)이다.

홍콩의 광동인들과 베트남인들은 사실 먼 친척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중국이 홍콩을 무력으로 점령하면 자신들이 해방시켜 줄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한다.

월남, 즉 베트남은 명나라와 청나라로부터 혹독한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끝까지 투쟁해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이전 송대에는 월남(베트남)이 10만의 병력으로 중국을 선제공격하기도 했다. 월남에는 한때 공산주의로 중국과 관계 개선의 시기가 있었지만 문화, 역사적으로는 뿌리 깊은 반(反)중국 정서가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월(越)나라는 오(吳)와 함께 중국 남부의 패권을 두고 각축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 일모도원(日暮途遠)과 같은 말들은 바로 이러한 오나라와 월나라 간의 치열한 싸움에서 나왔다.

그 위치는 오늘날 저장성 사오싱(소흥)을 중심으로 광둥성, 장시성, 푸젠성 등의 중국 동남부와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월나라는 기원전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켰고 그 후 초나라에 멸망당한다. 이러한 월나라는 오나라와 초나라를 아우르며 중국 남부에 독특한 문화를 구축했다. 그 일면에는 사람들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는 자존심과 경쟁심이 있다.

홍콩인들에게도 그러한 쟁투의 전통이 있다. 직장에서 경쟁이 치열하고 일과가 끝난 후 마작에서도 치열한 승부 겨루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친지간에 우정도 끈끈하다. 한때 유행했던 홍콩영화들을 보면 홍콩인들은 친구 동료들에게 친절하고 싹싹하다가도 위협적인 상대에게는 사납고 용맹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오버액션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 광동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함부로 대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그런 홍콩의 조상들이 세운 오, 월에는 명검(名劍)이 있었다. 오나라 사람 간장과 그의 아내 막야가 만들었다는 철검은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월검(越劍)이라 불렀다. 그 만큼 월나라에서는 우수한 철이 났고, 이를 제련해서 단단하고 잘 드는 칼과 도끼를 만들었다.
 

   
▲ 월나라의 검

명검에 서린 越의 자존심과 승부욕

그런 전승을 입증해 준 사례도 있다. 1965년 호북성 강릉현 무덤에서 출토된 동검은 바로 바로 월나라에서 난 구리와 기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동검의 표면을 황화구리로 피막을 덮었는데 발굴 당시에도 녹이 슬지 않아 날이 새파랗게 서려 있었다고 한다. 그 월검은 현재도 호북성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군복을 입고 전마에 올라타, 허리에 월검 늘이고 연호를 차네.”
월검은 조선 중기 문인 박세당의 ‘서계집’에도 등장한다. 월나라의 검은 용맹한 장수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홍콩인들의 조상 월족은 중국 한(漢)족과는 처음부터 달랐다. 한족이 황하강을 중심으로 성립된 문명이라면 월족은 양자강이 그 문화의 지리적 토대였다. 월족은 스스로를 황제 하후(夏后)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하후는 하(夏)나라 전반을 통치했던 전설의 임금이다. 장자(壯者)는 월인(越人)들이 쌀을 재배하고 몸에 문신을 새겼다는 기록을 남겼다. 최근 학계의 연구조사로 밝혀진 인도와 중국 간의 ‘쌀농사 원조’ 경쟁은 중국의 승리, 더 정확하게는 이 광동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최근 유전자 판독으로 중국 양자강 유역 광동지방에서 서식하던 야생초 피토리스(Phytolith)가 오늘날 인류가 경작에 성공한 순화미의 모든 조상이었던 것. 다름 아닌 오나라와 월나라의 땅이었다.

이러한 역사들은 어쩌면 홍콩인들과 상하이인들, 그리고 대만인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비교적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문화적 유전자인지도 모른다. 광동인들의 상술은 너무나 뛰어나서 북경인들에게는 그들과 교역하는 데 트라우마가 있었다. 어떻게 교역을 하든 결국 광동인들은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렇기에 ‘하늘이 무서우랴 땅이 무서우랴, 광동사람 광동말 하는 것이 가장 무섭다’는 속담이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

광동의 문화·역사적 전통은 오늘날 홍콩인들에게 공산주의를 거치지 않고 영국을 통한 자유주의적 계몽주의라는 근대화 경험으로 이어졌다.
 

‘광동사람 광동말 하는 것이 가장 무섭다’

1841년 영국의 홍콩섬 점령과 함께 시작된 99년간의 조차지로서 홍콩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다. 총독부가 설립은 됐지만 홍콩에는 복지시설도 없었으며 생산 인프라조차도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과 부두였다.

홍콩인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영국의 자유방임주의 정책으로 홍콩을 지난 한 세기 최대의 국제 금융허브와 물류도시로 만들어 냈다. 오로지 가진 것은 인적자원뿐이라는 생각은 홍콩으로 하여금 최고의 교육 환경을 조성했다. 그 인적 경쟁력이 오늘날의 홍콩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홍콩은 지난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자유지수가 높은 국가였다. 1984년 홍콩을 중국에 이양한다는 협정이 타결될 때만해도 홍콩의 1인당 GDP는 미국의 반에 불과했지만 오늘날 홍콩의 1인당 GDP는 미국과 맞먹는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홍콩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하지만 그런 홍콩은 이제 갈림길에 섰다.

중국의 ‘일국양제’라는 자치시스템이 이번 친중적 정권 수립의 기도로 불확실의 상태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위협에 어쩌면 홍콩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조상 월나라와 오나라로부터 이어받은 투쟁의 정신이 본능적으로 타오르는지도 모른다.

‘중국 설날이 아니라 음력 설날입니다.’

올해 구정, 홍콩의 시내에는 외국인들에게 그렇게 알리는 전단들과 포스터들이 등장했다. 중국문화의 원류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족의 황제 헌원에게 패해 남쪽으로 이동해 남만이 되기 전 이미 황화강과 양자강 사이에서 치우(蚩尤)를 영웅신으로 갖고 있던 동이족의 한 갈래이기 때문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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