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동시에 물리학상을 탄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런 상을 수여하는 주체에 대해 어처구니없다는 비난을 보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자연과학에는 타협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노벨 경제학상에는 천동설과 지동설처럼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경제학자들이 모두 노벨상을 타는 경우가 있다.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두 명의 학자, 시카고대의 유진 파머 교수와 예일대의 로버트 실러 교수의 경우가 그렇다.
파머 교수는 ‘시장은 언제나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다’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는 ‘효율적 시장가설’의 주창자다. 시장은 이미 모든 정보를 스스로 반영하고 있고 그렇기에 시장의 실패는 없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실러 교수는 파머 교수의 ‘효율적 시장 가설’을 정면 반박한다. 만일 시장이 항상 효율적이라면 주가 변동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실러 교수는 인간이 가진 ‘야성적 충동’이 합리적 의사결정을 할 수 없기에 시장은 급등과 급락으로 요동친다고 주장한다.
이 둘에게 동시에 상을 준 것은 ‘시장은 항상 균형 상태에 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동시에 인정해 버린 셈이 돼버린다. 이러한 노벨 경제학상의 판단에 대해 영국 런던정경대 존 케이 교수는 “천동설과 지동설의 동거”라고 비판했다.

천동설도 옳고 지동설도 옳다?
노벨 경제학상이 끊임없이 정통성 시비에 오르는 데는 이 상이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있지만 그보다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엄밀성과 정치성에 대한 논란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노골적 비판의 시선은 주로 좌파 비주류 진보 경제학자들로부터 제기되지만 신고전파나 케인즈주의와는 다른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입장에서도 노벨 경제학상의 수상 편력들은 좀 당황스럽다.
흔히 경제학의 두 라이벌로 일컬어지는 정부개입주의 케인즈와 시장자유주의 하이에크가 어떻게든 모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경제학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노벨 경제학상 수여는 경제학을 정치학의 ‘아류’로 만들어 버리는 점이 있다. 다시 말해 손익의 계산이라는 자본주의경제를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분류해서 무엇이 현실 정합적인 이론인지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 ‘당대에 가장 인류에 공헌한 자에게 수여하라’는 취지에 반추해 보면 다소 실망스럽다.
경제학이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실험을 통해 이론을 입증할 수도 없거니와 정치적 이념이 다른 국가 간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이론이 정책으로 함께 반영될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노벨 경제학상은 인류에게 공헌한 이들에게 주는 상이 맞을까 싶은 반문은 이렇듯 계속 더 무거워만 진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사람들 때문에 인류는 싸우지 않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이들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진영을 갈라 싸운다.
“자본주의 시장은 탐욕이 넘치는 곳이고 불평등이 초래되는 곳이기에 정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는 중앙통제론자들과 “자본주의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기조정능력을 갖고 있기에 정부 개입은 필요없거나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주장들은 다름 아닌 ‘정치적 입장’으로 재배치된다.
경제학은 스스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선택은 그 나라 국민들과 위정자들에게 달려 있다.

학문의 세계 넘어 정치에도 영향 미쳐
노벨 경제학상의 문제는 이 상을 수상한 이들의 권위가 학문을 넘어 정치사회적 영향을 갖게 된다는 점에도 존재한다. 케인즈의 후학들과 시카고학파 간의 격돌은 단지 학문의 세계로 그치지 않고 정책시장에서도 격돌한다. 여기에 더 세분화된 뉴케인지언들과 통화주의자들 간의 전쟁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실러 교수와 200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교수는 최근 세계경제의 ‘장기침체론(secular stagnation)’을 두고 한바탕 격돌을 벌였다.
실러 교수는 지난 18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전염성 강한 장기침체론이 글로벌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확산했다”며 “이로 인한 공포심이 높아져 지난달 18일 이후 증시가 6% 이상 급락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폴 크루그먼 교수가 주장한 장기침체론, 그러니까 유럽을 비롯한 정부의 불충분한 재정확대정책이 장기침체를 불러오고 있다는 내용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격돌은 사실 주식시장과 금융을 전문으로 하는 로버트 실러 교수의 영역에 거시경제학자인 크루그먼이 소위 ‘숟가락질’을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제학자들이 이제는 사회심리학자와 정치학자로 변신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프랑스 경제학자 장 티롤 틀루즈대 교수로 낙점됐다. 티롤 교수는 독과점 기업에 대한 규제 연구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산업별로 다양한 규제의 틀이 필요하다고 봤고 특히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인터넷 기업들에 대한 독과점 규제가 기존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장 티롤 교수는 시장에서 독과점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며 특허권 등을 통한 담합과 같은 독과점 모델은 사유재산권의 보호를 통해 더 많은 창의적 개발을 불러 올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근대 계몽주의의 산물, 노벨 경제학상
그러한 티롤 교수는 수학적 게임이론 등을 활용해 정부가 어떻게 하면 독과점 산업과 기업들을 효과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적 모델을 제시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한마디로 정책당국 입장에서 수월한 규제 접근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티롤 교수는 그런 입장에서 천동설과 지동설을 동시에 수용한 셈이다. 정부의 진입 규제로 독과점을 형성해 놓고 독과점을 다시 효율적으로 규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시장에 진입장벽이 존재하지 않고 대체재가 존재한다면 시장에서 독점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시장경제론자들의 주된 관점이다. 그렇다면 독과점에 대한 규제는 경쟁을 촉진시키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이 된다.
하지만 티롤 교수는 그러한 해법보다는 정부가 합리적 계산을 통해 독과점을 효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입장이 된다. 당연히 정치인들이나 정부의 입장에서는 시장원리에 의한 독과점 규제 해소보다는 정부 관치를 통한 문제 해결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 결과다. 198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뷰캐넌은 그의 공공선택론에서 결국 공익을 추구한다는 관료들도 자신의 사익을 위해 정책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을 입증해 냈다.
역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시장에 분산된 지식으로 인해 관료나 경제학자들이 그 분산된 지식들을 모두 취합해 통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의도를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라고 불렀다.
복잡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그보다 덜 복잡하고 조잡한 논리적 구성주의 방식으로 통제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단통법과 골목상권 보호를 위한다는 대기업 프랜차이즈 출점 제한, 그리고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이 가져온 시장왜곡과 부정적인 결과들을 들 수 있다.
노벨 경제학상은 근대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자연과 과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과학자들의 태도와 경제학자들의 태도는 같을 수 없다.
현대 주류 경제학자들의 가장 큰 모순점은 세상을 몇 개의 단순한 모델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지나친 이성에 대한 맹신적 태도다. 마치 경제학이 자연과학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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